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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할아버지는 강상홍(姜相洪)이다. 강병관(姜炳觀)[1901~1928]은 불행하게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이 걸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눈물을 흘리며 “부모가 집에 계시니 눈을 감을 수 없다”면서 울부짖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937년 5월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3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온갖 약을 썼으나 전혀 차도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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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 있던 탁주 제조 공장. 고령탁주합동제조장은 일제강점기 고령 지역에 자리 잡은 일본인이 탁주와 약주를 제조하여 고령군 일대에 공급하기 위하여 고령양조장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8·15광복 이후 한동안 대가야읍내 유지인 정춘택(鄭春澤)이 인수해서 운영하다가 경찰 출신 김영호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1972년부터는 이동주가 경영권을 인수해서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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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숙도(叔道), 호는 월계(月溪). 아버지는 진사(進士) 곽수강(郭壽岡)이다. 곽유(郭逌)[1655~?]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며, 1690년(숙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평소 부모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부모가 병이 들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소생하게 하였다.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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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성산(星山). 남편은 곽희수(郭希壽)이다. 곽희수 처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시아버지가 결혼 초부터 병으로 앓아눕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남편은 전력부위 수문장(展力副尉水門將)으로 근무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이 사실을 안 왜구가 남편의 군사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약장수를 가장하고 성산이씨에게 접근하자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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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기계유씨(杞溪兪氏)로 유문준(兪文濬)의 딸이며, 기봉연(奇鳳衍)의 아내로 가정 형편이 매우 궁핍하여 아침 저녁의 끼니를 죽으로 때워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밥상에는 항상 흰 쌀밥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형편이 너무 어려워 쌀을 마련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자신의 머리를 잘라 팔아 그 돈으로 시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유씨는 부지런한 성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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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김성희(金性熙)이며, 남편은 기용걸(奇龍傑)이다. 기용걸 처 경주김씨는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슬퍼하며 곡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살림이 빈곤한데도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를 위해 하루 세 잔씩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드렸으며, 조석을 받드는 데 밥이며 반찬을 정성을 다해 지어 올렸다. 그러다 중한 병에 걸려 수개월 앓아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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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첨지(僉知) 민국창(閔國昌)이며, 남편은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의 6세손인 기원택(奇元澤)이다. 기원택 처 여흥민씨는 시부모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부지런히 베를 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았다. 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조석을 받드는 데 술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이 같은 일을 60여 년간 한결같이 하였다. 불행히 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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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원(達元). 중종 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김효동(金孝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김호일(金浩一)이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상능(金相能)[1834~?]은 지금의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에서 태어났다. 평소 부모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셨는데, 칠순의 아버지가 수개월 동안 병이 들어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고 아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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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지역의 효부. 본관은 완산(完山). 외가가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11세손이며, 남편은 김세유(金世瑜)이다. 김세유 처 완산최씨(完山崔氏)는 평소 가난한 살림에도 홀로 된 시아버지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던 중 남편과 시아버지가 학질에 걸렸는데, 좋다는 약을 써도 전혀 차도가 없고 오히려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우연히 집 마당으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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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일선(一善). 호는 매암(梅庵).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7세손이다. 김시사(金是泗)는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를 마치 어른같이 하고, 표주박 하나를 벽에 걸어 놓고 죽을 먹는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어머니의 등에 종기가 나자 상처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지나친 슬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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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삼연(三然). 아버지는 김보경(金寶鏡)이다. 김영곤(金永坤)은 타고난 성품이 남달라서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부모님을 모시는 데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이러한 성품을 가졌기에 부모의 명을 단 한 번도 거역하는 일이 없이 성심으로 받드는 모습으로 이웃을 감동시켰다. 고종 때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중학교관(中學校官)에 추증되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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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행정가. 김정근(金正根)[1916~]의 호는 우영(宇瑩)이며,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후 문경군수를 지냈다. 1948년에는 이홍직(李洪直)의 후임으로 제2대 고령군수가 되었지만, 5개월 만인 1949년 2월 퇴임하였다. 이후 광업과 상업에 종사하다가, 1958년 5월 2일 시행된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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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정치인. 김홍식(金洪植)[1912~1992]은 본관이 김해(金海)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김천보통학교 교사로 5년간 근무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시행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고령 지역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8명의 후보와 경쟁한 가운데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남택(鄭南澤) 후보가 자유당 공천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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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는 낙동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고령 지역은 낙동강 총 연장의 20%에 해당하는 55㎞의 연안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왜관과 함께 낙동강 중류의 중심 고장이 되었다. 대가야읍 고아리 일대의 지명이 ‘배울’·‘뱃골’·‘주곡(舟谷)’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대가야 시절 배를 건조하던 곳이기도 했다. 고령군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개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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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변이(變而).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낸 노삼(魯參)이다. 노지도(魯至道)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와 함께 왜구에게 붙잡혀 그 칼날에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아버지를 품에 안듯이 하여 칼날을 막았다. 화가 난 왜구가 마구 칼을 휘둘러 온몸을 난자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적장에게 혈서를 써서 던지고는 아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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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현 대가야읍]에 있었던 농기구 판매 업소. 농민상회에 관련된 기록은 『고령군지』에 짧게 상호만 나와 있을 뿐 현재까지 다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설립자는 정춘택과 박광수(朴光壽)로 오래 전에 사망하였다. 설립자 중 박광수의 아들이 생존하고 있으나 기록할 만한 자료를 입수할 수 없는 실정이다. 정춘택은 자산가인 정운한의 아들로 정희택, 정남택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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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효자. 평소를 부모를 모시는 데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앓아누워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문득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박문창은 급히 강으로 달려가 고기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고기가 잡히지 않자 박문창은 애타는 마음에 땅을 치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큰 물고기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또한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하여 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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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효자. 부사(府使)를 지낸 박윤서(朴潤緖)의 아들로 효종(孝宗) 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 선전관(訓練院 宣傳官)에 이르렀다. 박윤서(朴潤緖)는 평소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부모의 생명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소생케 하고자 하였다. 박윤서(朴潤緖)가 부모에게 보인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예절을 뛰어 넘는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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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충열공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증손녀이다. 박사전(朴思全)의 아내로 나병에 걸린 남편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부인 조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남편을 소생케 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병세가 워낙 깊어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난 조씨는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해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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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치순(致淳), 호는 사포(沙圃). 증조할아버지는 박사준(朴思峻)이다. 박상림(朴尙林)[1839~1904]은 10세에 배우던 책을 덮고 나무를 하여 부모의 수고를 대신하였고, 15세에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극진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다. 어머니가 머리에 종기가 나서 온갖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고 고통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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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덕부(德夫), 호는 죽연(竹淵). 아버지는 양산군수를 지낸 박계조(朴繼祖)이다. 박윤(朴潤)[1517~1572]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낙천(洛川) 배신(裵紳) ,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월오(月塢) 윤규(尹奎) 등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극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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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출신의 효자. 박진문(朴震文)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병이 깊어 위독하자 피를 내어 약을 지어 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막도 짓지 않고 무덤 옆에 기거하였는데, 이웃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여막을 지어 주었으나 들어가 거처하지 않고 밤이면 무덤에 엎드려 슬피 울고 낮이면 나무에 매달려 목 놓아 큰 소리로 울기를 밥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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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래(仲來), 호는 용재(慵齋). 아들은 박섬(朴暹)[1696~1760], 손자는 박사연(朴思淵)[1732~1756]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박종주(朴宗冑)이다. 양죽당 정완[참판공으로 임진왜란에서 창의함]의 5대손이다. 박태중(朴泰重)[1677~1729]은 5~6세에 이미 완숙한 군자의 모습을 갖추었고, 장성하여서는 덕행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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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성산(星山). 이기춘(李起春)의 조카딸이며, 남편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배두(裵(山+斗))이다. 배두 처 성산이씨(星山李氏)는 규범이 엄한 가정에서 자라 출가하여 정성과 공경으로 시아버지를 모셨다. 그러던 중 초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과 마음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화재가 일어나 집과 사당이 모두 소실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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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이재홍(李齋洪)의 딸이며, 배우현(裵瑀鉉)의 아내로 남편이 병으로 앓아눕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남편의 생명이 위급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소생케 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정절을 지키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경상북도 고령군 명곡촌(明谷村)[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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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열녀. 한씨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편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포로가 된 처지에 이르렀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그녀를 왜구들은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위협하며 겁탈하려 달려들었다. 이에 그녀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다. 하지만 왜구들의 강압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그녀는 칼로 자결하였다. 그녀의 죽음을 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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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화일(華日). 아버지는 배경혁(裵敬赫)이다. 배학조(裵學朝)[1872~1922]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근검하여 일찍이 벼슬에 뜻을 버리고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마음과 몸을 다하였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형제들이 한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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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에서 매 3일과 8일에 개시되던 오일장. 성산장은 일제강점기에 개설되었다. 성산장이 열리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得成里)는 원래 성주군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1906년(고종 43) 다산면과 함께 고령군으로 이속되었는데 조선시대 역(驛)이 있었던 무계(茂溪)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무계에는 무계장이 개설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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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고려 시중(侍中)을 지낸 성송국(成松國)의 13세손이다. 성풍세(成豊世)[1572~1650]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홀로 된 어머니를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로 피난시키고 난 뒤 자신은 상주진(尙州鎭)의 병사로 입대하였다. 훈련을 마치면 상주진에서 나정리까지 180리 길을 저녁에 갔다가 아침이면 돌아오기를 계속하였다. 상주진의 병마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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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여인(汝引). 아버지는 신경추(申景樞)이다. 신급(申汲)[1624~1695]은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급하자 자신의 피를 내어 약으로 썼다. 어머니의 장례 후에는 여막도 없이 무덤 아래에서 끼니도 거른 채 슬피 울었는데,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치는 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몸이 상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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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초천(樵川).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신계상(申啓相)이다. 신정제(申正濟)는 부모가 동시에 전염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모두 베어 피를 흘려 넣어 회생하게 하였으며, 입맛을 잃어 음식을 먹지 못하자 얼음 속에서 잉어가 솟아오르고 눈 속에서 토끼가 기어 나오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 그것으로 부모의 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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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한은(閒隱). 신정제(申正濟)의 고손자이다. 신종록(申鍾祿)[1830~1902]은 3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앓아눕자 낮에는 곁을 지키며 보살피고, 밤이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정화수를 길러 놓고 천지신명에게 어머니 대신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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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매 1일과 6일에 개시되던 오일장. 안림장은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다. 원래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는 조선시대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딸린 역(驛)이 있었던 지역이며, 대가야읍에서 북쪽으로 2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합천군과 연결되는 교통의 집산지이기도 하였는데, 1897년(고종 34) 역이 폐지되면서 주변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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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국서(國瑞), 호는 국포(菊圃). 오운(吳澐)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오연순(吳演淳)이며, 맏아들로 태어났다. 오상옥(吳相玉)[1847~1910]은 밖으로는 능숙한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안으로는 극진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다. 어머니가 병들어 의원에게 약을 구하러 가자, 인분을 약으로 먹이라고 하였다. 이에 인분으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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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기계(杞溪).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을 지낸 유정의(兪正義)이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경해(兪景海)[1501~1589]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14세에 아버지가 등창을 앓아 고생하자 입으로 환부를 빨아 낫게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모두 목숨을 연장하게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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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정치인. 유상호(兪尙浩)는 고령 지역의 토성(土姓)인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후손으로 고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7년 동안 고령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해방 후 고령금융조합장이 되었으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령군지부 지부장을 지냈다. 1952년 5월 10일 제헌헌법 제97조에 따라 시행된 지방자치 선거에서 61명을 뽑는 초대 경상북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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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훈혜(薰兮). 증조할아버지는 유경해(兪景海)이다. 유세훈(兪世薰)[1583~1649]은 평소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아버지가 학질에 걸려 오랜 병고 끝에 입맛을 잃었다가 갑자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이라 고기를 잡을 수 없어 두껍게 언 얼음을 두드리며 통곡하자 물새가 날아와 물고기를 떨어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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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여경(汝慶). 유세훈(兪世薰)의 고손자이다. 유정환(兪鼎煥)[1716~1785]은 아버지가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인분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으며, 생명이 위급함에 이르러서는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연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병세가 위급하여 의원을 모시러 그믐밤에 홀로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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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이경용(李慶容)[1911~]은 일본 가와사키중학교[川崎中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해방 이후 생사(生絲) 업체인 대구 옥균공업(玉菌工業)과 경북잠사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그 후 달성제사공업주식회사의 후신인 대구 달성산업 대표를 역임하였으며, 대한잠사회 경상북도지회 지회장, 한국생사수출조합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경북잠사공업주식회사와 달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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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주(驪州).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5세손이다. 이광영(李光榮)은 부모를 모시는 데 극진한 효성을 보였으며, 부모의 생명이 위급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연명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6년간 시묘하였으며, 해상(解喪) 전에 또다시 상을 당하자 다시 3년간 시묘를 하였다. 1558년(명종 13) 조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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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죽함(竹檻). 이근수(李根壽)[1832~1886]는 지금의 고령군 덕곡면 예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모시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가 방안의 냉기와 습기로 말미암아 몸에 마비가 일어나는 풍비(風痺)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고, 매일 하늘에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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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군인이자 기업인. 이맹기(李孟基)[1925~2004]는 본관이 전주(全州)로, 호는 해성(海星)이다.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에서 태어났다. 이맹기는 해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 해군포술학교 초대 교장, 함대 사령관, 제6대 해군참모총장[1962~1964]을 역임하다가 1964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직후 국내 최대 해운 회사인 대한해운공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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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이성관(李成觀)의 딸이며, 이수을(李洙乙)의 처로 가정 형편이 극도로 궁핍함에도 한번도 얼굴에 근심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고 극진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셨다. 밭을 갈러 나간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부축하여 집으로 모셔 와서는 3년간 수발을 들었다. 그 동안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는 것은 물론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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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성산(星山). 아버지는 배정휘(裵正徽)이며, 남편은 이재복(李載福)이다. 이재복 처 성산이씨(星山李氏)는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엎드려 자리를 뜨지 않았으며, 머리를 감거나 빗지도 않았다. 또한 밥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남과 말도 하지 않았고 하늘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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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열녀(烈女). 광산이씨(光山李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의 딸로 나이 19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을 가다가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왜구는 이씨를 희롱하며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이씨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칼을 꺼내어 왜구에게 잡혔던 자신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씨의 단호한 행동에 겁을 먹은 왜구는 도망치듯 물러갔다. 하지만 잘린 손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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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행정가. 1945년 10월 미군은 경상북도를 접수한 뒤 일본군의 무장 해제, 김대우(金大羽) 지사를 비롯한 일본인 관리의 파면과 함께 한국인 관리의 임용을 단행하고 도내 각 군청을 접수하여 11월 13일 도내 전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때 고령군은 달성군, 성주군과 더불어 미 제34 군정대 관할이 되었고, 고령 출신 이홍직(李洪直)이 초대 고령군수에 임명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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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고령 출신의 친일 승려이자 언론인. 장도환(張道煥)[1903~?]은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에 적을 둔 승려이며, 금성(金城)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하였다 장도환은 1926년 일본 도쿄 유학 중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라는 재일(在日) 유학승(留學僧) 모임의 간부를 맡았고 기관지 『금강저(金剛杵)』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와세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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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이지(以之), 호는 경모재(敬慕齋). 할아버지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낸 전극창(全克昌)이다. 전주국(全柱國)[1692~1777]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33세가 되던 1723년(경종 3)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하였고, 1728년(영조 4)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을 지켰다. 1734년(영조 10) 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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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정치인. 정남택(鄭南澤)[1912~]은 본관이 연일(延日)이며, 그의 아버지는 고령면[현 대가야읍] 내 자산가 정운한(鄭雲漢)이다. 정운한(鄭雲漢)정운한은 1920년과 1936년 대홍수를 겪으며 물이 넘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다섯 개의 마을 주민들을 위해 마을을 흐르는 하천 양쪽에 제방을 쌓았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교토 동사중학교를 졸업한 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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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유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호는 월담(月潭). 아버지는 정린(鄭麟)이다. 부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여동생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정사현(鄭師賢)은 9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어른같이 하여 몸이 야윌 정도였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또한 슬픔을 금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에 큰 감화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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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창녕(昌寧).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여동생이며, 남편은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이다. 정사현 처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계절마다 의복을 지어 묘소 앞에 드렸다가 불에 태우는 일을 3년간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는 언제나 너희 아버지를 뒤따르고자 하였으나 너희들이 어려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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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기업인. 정춘택(鄭春澤)은 본관이 연일(延日)로, 자산가인 정운한(鄭雲漢)의 아들이며 정희택(鄭喜澤)·정남택(鄭南澤)과 형제 사이이다. 중앙에 감사원장, 국회의원 등으로 진출한 형제들과 달리 지역 유지로서 일관하였다. 일제강점기 고령면[현 대가야읍] 내에 농기구 판매업소인 농민상회(農民商會)를 설립하여 박광수(朴光壽)와 함께 운영하면서 탈곡기·제초기 등 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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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행정가이자 정치인. 정희택(鄭喜澤)[1919~2000]은 본관이 연일(延日)로, 지금의 고령군 고령면[현 대가야읍]에서 태어났다. 정희택은 1942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한 후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46년 사법부 감찰관을 시작으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와 부장검사, 대구지방검찰청 및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대구고등검찰청과 서울고등검찰청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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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해주오씨(海州 吳氏) 오원(吳瑗)의 딸이며, 조규승(曺奎承)의 아내로 병든 시아버지를 봉양하는데 효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병이 너무 깊어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가 인육을 먹으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여 오씨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시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러자 시아버지의 병세가 점차로 차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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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김재협(金載協)의 딸이며, 조범환(曺範煥)의 아내로 시집을 온지 얼마 되지 않은 21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김씨는 손수 남편의 묘소 옆에 거처를 짓고 신주를 받들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시묘를 하는 동안 길쌈을 하여 남편 무덤의 모든 석물을 마련하였다. 그 후에도 김씨는 시묘살이를 그치지 않고 평생토록 이어갔다. 경상북도 고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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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출가한 효부. 현감을 지낸 임중수(林重秀)의 딸이며, 조상벽(趙相璧)의 아내로 평소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임씨는 남편이 병으로 생명이 위급하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소생케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오씨는 장례가 끝나는 날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해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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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유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현서(玄瑞), 호는 소은(蘇隱). 아버지는 조후식(趙厚植)이다. 조성린(趙性麟)[1856~1935]은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오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과 총명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20세 때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사경에 이르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게 한 후 쾌차하게 하였다. 그리고 1870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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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정치인. 조일환(曺逸煥)[1916~]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에서 태어났다. 조일환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한동안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1958년 5월 2일 시행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면서 정계에 투신, 대구시 남산동·대명동·봉덕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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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지역의 열녀. 본관은 진주(晋州). 아버지는 진사(進士)를 지낸 하서천(河瑞千)이며, 남편은 조정필(趙廷弼)이다. 조정필 처 진주하씨(晋州河氏)는 남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곡을 하였는데, 그 곡소리가 처음 상을 치를 때와 같았다. 아들을 잃은 시아버지의 슬픔을 씻어 드리기 위하여 온갖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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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효자. 최광도는 학문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성현의 가르침을 외워 남 앞에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최광도의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일찍이 과거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그 대신 일상 생활 속에서 예절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덕을 쌓아갔다. 최광도는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모셨다. 부모가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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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여보(儷甫). 아버지는 허명신(許命申)이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항(許伉)[1636~?]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꿩이 홀연히 부엌으로 날아들었고,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이 덮인 못 위로 고기가 뛰어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같은 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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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의 정치인. 홍영희(洪永熹)는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자유당 고령군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 8월 8일 시행된 제2대 경상북도 도의원[참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됨으로써 1960년까지 고령군 출신 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도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으며, 제2대 경상북도 도의원은 총 61명이었다. 정당별로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