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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경춘(韓慶春)·한여현(韓汝賢) 부자가 편찬한 충청남도 서산의 사찬 읍지. 『호산록(湖山錄)』은 1619년 서산의 사족[문벌이 높은 집안]인 한경춘·한여현 부자(父子)가 편찬한 사찬 읍지로, 1600년대 이전 서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사찬 읍지가 흔치 않은 가운데 특히 충청남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찬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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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가사초등학교 뒤편 야산 중턱에 있는 바위. 가사리 여근암(柯沙里女根岩)은 가사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600m 지점의 뒷산 중턱에 있는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생긴 바위이다. 여근암이 있는 곳은 지금은 인적이 끊겼지만, 과거에는 서산에서 태안으로 가는 큰길이었다고 한다. 여근암 아래에는 여기정(女妓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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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경휴(景休). 아버지는 강의(姜儀)이고, 아들은 영산현감으로 임진왜란 때 죽은 강효윤(姜孝胤)이다. 서산의 진주 강씨는 서산 지역에서 오래 산 성씨로 서산 강씨라 불리기도 한다. 기록이 많지 않아 추적이 어렵지만 서산의 유력 성씨인 청주 한씨 한효순(韓孝純)의 후취 부인이 강몽서(姜夢瑞)의 손녀인 것으로 미루어 영향력 있는 성씨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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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서산. 자는 선술(善述). 아버지는 진사 강몽서(姜夢瑞)이다. 아들은 집의(執義)를 지낸 강수이다. 강씨는 서산의 토성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기록이 많지 않아 추적이 어렵다. 1619년 편찬된 서산의 사찬 읍지 『호산록(湖山錄)』에서는 강흡(姜洽)이 향임을 맡아 고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였다고 하니 그가 강효윤(姜孝胤)의 조상일 것으로 추측될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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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향임(鄕任). 1619년에 편찬된 서산 지방의 사찬 읍지인 『호산록(湖山錄)』에 ‘강흡(姜洽)이라는 사람이 향임을 맡아 고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흡은 향임으로서 기품이 맑고 강하여 시비가 분명하였으며, 고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고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자 했다. 백성 가운데 범법자가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죄목을 붙여 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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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노비. 걸포(乬布)는 귀천(貴千)과 형제로 노비였다. 둘은 무척 우애가 깊어 먹을 것이 있으면 꼭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어느 해 형의 목화밭에 목화가 피지 않자 동생은 자기 밭에서 좋은 목화송이를 따서 나누어 주었다. 형제의 이런 돈독한 우애는 주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걸포와 귀천의 이야기는 서산의 사찬 읍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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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김연(金堧)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경주 김씨는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의 유력한 세거 사족으로 1500년대 중반에 입향 한 이후 서산 지역에서의 향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였고, 단구자김적이나 학주김홍욱 등 다수의 인물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특히 이곳 출신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가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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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계복(戒福)은 아버지 순평(順平)이 죽자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다. 상을 치르는 3년 동안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아 몸이 나뭇가지처럼 야위니 보는 사람마다 감복하였다. 또한 부모의 심정으로 동생을 보살피고, 재산을 나눌 때는 척박한 토지는 자기가 갖고 기름진 논밭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주었다. 집에서 쓰는 가재도구와 곡식도 사사로이 차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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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군수를 역임한 문신이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1582년(선조 15) 서산군수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서산에 왔던 수령 중 최고의 선정(善政) 수령으로, 서산 5현으로 추대되었다. 학문 발전과 후학 양성에 전력하고 『호산록(湖山錄)』 발행을 권유하는 등 서산의 사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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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도의 수군 편제에 따라 서산에 속해 있던 방어 시설. 고려 후기 서해안 지역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1373년(공민왕 22)에는 태안군이 폐군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서해안 일대에 군사 시설을 마련하면서 파지도에 성을 쌓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들어와서는 고파도에 파지도만호진을 설치하였고, 태종 때에 파지도만호영을 태안 호리로 옮기면서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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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담양. 자는 우경(虞卿), 호는 경재(敬齋). 1729년 정리된 담양 국씨 족보에는 성유(聖喩)로 적혀 있고, 1974년 족보에는 현남(賢男)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국여명(鞠汝明)으로, 호는 정숙(靖肅)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창수(柳昌壽)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령 유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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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도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 마을이다. 본래는 천수만 내에서 안면도에 딸린 황도와 더불어 가장 큰 섬이었다. 그러나 1982년 10월 26일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대로 갯가에 의지하여 살아온 간월도는 뭍으로 변했다. 가구 수는 80여 호에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큰말·벗말·달박골·갱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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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서산의 경주 김씨 입향조. 본관은 경주. 고려 말의 충신인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이다. 아들은 증좌승지 김호윤(金好允)과 효릉참봉을 지낸 김호열(金好烈)[1534~?]이다. 맏손자[김호윤의 아들]는 송곡서원에 배향된 김적(金積)[1564~1646]이다. 증손자[김적의 아들]는 김홍익(金弘翼)[1581~1636]과 김홍욱(金弘郁)[1602~165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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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김옥현(金玉鉉)[1781~1800]은 1797년(정조 21) 5월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붙잡혀 서산 감옥에 투옥되자 16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따라가서 곁을 지켰다. 김옥현이 하도 간절하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옥리(獄吏)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였다. 주변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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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유(德裕), 호는 용주(龍洲)·용곡(龍谷). 할아버지는 김자진(金自珍)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두징(金斗徵)[1646~1678]이며,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파평 윤씨 윤필은(尹弼殷)의 딸이다. 김유경(金有慶)은 서산 대교[한다리] 경주 김씨의 후손이다. 세칭 한다리 김씨라고 불리는 김유경의 가계는 김연(金堧)[149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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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연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인 김유경(金有慶)의 신도비와 묘역. 김유경[1669~174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산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마을의 명문 경주 김씨(慶州金氏) 가문의 후손이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 합격 후 1710년(숙종 36) 문과에 급제하고 수많은 관직을 거쳐 1746년(영조 22) 좌참찬으로 관직에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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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부성위(富城尉)[서산현령]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할아버지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봉된 김광세(金光世)이고, 아버지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낸 김경량(金鏡亮)이다. 김주정(金周鼎)[1228~1290]은 1257년(고종 44)에 음서로 부성위가 되었다. 부성위로 제수되었을 때, 몽고병이 대대적으로 침략하자 적을 방어하고 백성들을 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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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용계(龍溪). 평양서윤을 지낸 김순성(金順誠)의 현손으로, 생부는 영동현감을 지낸 김표(金彪)이며, 재종숙 김양(金讓)에게 입양되었다. 김지남(金止男)[1559~1631]은 1591년(선조 24)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43인으로 합격하고 그 해 별시 문과에 병과 12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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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안주목사 김연(金堧)이다. 부인은 재령 이씨이며, 사위 중 한 명이 광산 김씨인 용천(龍川) 김지남(金止男)이다. 경주 김씨가 서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 명종 조[1545~1567]에 만년의 은거지로 이곳을 택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산에 이거하여 정착한 것은 김연의 큰아들인 김호윤(金好尹)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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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유생.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이다. 아들은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다. 손자는 김홍욱(金弘郁)이다. 1500년대 중반 김연이 정계 은퇴 후 서산에 자리를 잡아 경주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모여 살았다. 마을에 큰 다리가 있어 유계리의 경주 김씨를 ‘한다리 김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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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鞠周)를 시조로 하고 임진왜란 후 입향한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담양 국씨는 조선 전기 서산의 지리지나 읍지의 성씨조나 인물조에 나타나지 않는 성씨로 임진왜란 이후 서산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1646년 『인조실록(仁祖實錄)』 5월 23일 기사에는 서산 사람 조시응(趙時應)이 정원에 나아가 유학(幼學) 국성유(鞠聖兪) 등의 역모를 상변(上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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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노비. 노비 대언(大言)은 삼대에 걸쳐 개심동(開心洞)[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로 추정]에 살았다. 대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15세 무렵부터 마늘, 파와 같은 음식을 가리고 20세에 선법(禪法)을 배워 입산수도하니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대언은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않았다. 『호산록(湖山錄)』은 대언의 강직한 성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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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 도비산의 동록에 위치한 동사(東寺)는 기이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동쪽으로 간월호를 바라보고 있다. 절을 둘러싼 봄의 벚나무와 간월호의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 아름답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모두가 서쪽을 바라보는 서해안의 도비산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동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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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수석동에 있는 작은 망루. 서산 정씨 시조 정신보(鄭臣保)[?~1261]와 정인경(鄭仁卿)[1237~1305]과 관련된 사적이다. 양렬공 정인경은 14세기 고려의 정치인으로서 서산의 중흥조에 해당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정신보, 정인경 부자는 남송에서 망명하여 처음 간월도에 살다가 서산 시내 대사동으로 주거를 옮겼다. 서산에서 생활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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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 망일산 170m 정도의 위치에 있는 망일사(望日寺)는 정충신(鄭忠信) 장군이 신병 치료 차 들렸던 절로 알려져 있다. 옛날 망일사에는 철마가 있었는데 한 청년과 더불어 외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청년이 휘두른 철도리깨와 철마는 현존하지 않지만 외적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바람이 잘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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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있는 산. 『호산록(湖山錄)』에서는 망일산을 대산(大山)이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군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이 산은 바다 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듯해서 그 형체가 구릉보다 더 높고 크지 않지만, 바다 가운데 가리는 것이 없어서 대산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망일산 일대를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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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충신.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달원(達源).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문응벽(文應璧)이다. 문성해(文成海)[1540~?]는 1575년(선조 8) 서산의 유생들과 함께 서산향교 이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8년(선조 21) 49세의 늦은 나이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 57위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공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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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 문수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73년 발견된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에 따르면 적어도 1346년(충목왕 2) 이전에 문수사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1530년(중종 25) 찬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기록이 보이지만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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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 고조할아버지는 대사성을 지낸 박간(朴幹)이고, 아버지는 박현룡(朴顯龍)이다. 어머니는 현감 윤환(尹瓛)의 딸이다. 박홍미(朴弘美)[1571~1642]는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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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 부석사(浮石寺)는 부석사 극락전(浮石寺極樂殿)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석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浮石寺極樂殿木造阿彌陀如來坐像)이 있었던 고려 시대의 사찰이다. 돌이 떠 있다는 ‘부석(浮石)’이라는 절 이름은 마치 서해 바다에 떠 있는 절이라는 신비감을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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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익(宋文翊)을 시조와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서산 송씨는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진 송문익을 시조로 하며, 봉해진 지역을 관향으로 삼고 후손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편찬된 각종 읍지류의 서산군 성씨조에 송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읍지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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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천수만 안쪽 창리 해안에 위치한 포구. 창리포구는 부석면의 남쪽 끝 해안에 위치한다. 동·서·남 3면은 천수만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태안군 남면, 남쪽으로는 안면도와 마주보고 있다. 창리에 속한 자연 마을은 창말·목말·구장터 등이 있고, 부속 도서로 대섬·쏘아섬·닭섬·검조도·시루섬·토끼섬 등을 거느리고 있다. 창리포구는 본래 서산군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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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명승 8개소. 조선 시대의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는 서산을 비롯한 내포(內浦) 지역의 풍요로운 물산과 아름다운 인심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토지는 기름지고 평탄하며 넓다.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서울 남쪽에 있어서 서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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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 서산시청에서 서산시 온석동 방향으로 난 지방도 649호선을 따라 700m 정도 들어가다 보면 향교골이 보인다. 향교골로 난 골목길을 따라 250m 정도 더 들어가면 옥녀봉과 성왕산 자락이 만나 배산을 형성하는 곳이 있는데, 서산향교(瑞山鄕校)는 이곳에 동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산향교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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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산리에 있는 사찰. 전하는 말에 의하면 934년(태조 17) 혜량국사가 창건하고 이름을 태조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 거사 시손(市孫)이 성왕사로 고쳤고, 1631년(인조 9) 송근춘이 성왕사로 출가하여 교화 활동을 하였다. 1644년(인조 22) 유대춘(柳帶春)이 요사채를 지었고 이후 개운암으로 개칭되었으며 1933년 예산 수덕사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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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령판관을 지낸 무신. 본관은 창녕. 자는 덕일(德一).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수(留守)를 지낸 성세정(成世貞)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성진(成鎭)이다. 7촌 작은아버지가 성혼(成渾)이다. 성응길(成應吉)은 성품이 온화하였다. 이른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30세 무렵에 판관으로 있다가 서산군수로 부임하였다. 1563년(명종 18)부터 1567년(명종 22)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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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화원. 본관은 지곡.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혹은 주경(朱耕). 1619년(광해군 11) 편찬된 『호산록(湖山錄)』에 ‘본읍지곡인(本邑池谷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견(安堅)은 세종~세조 대에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렸던 화원이다. 특히 세종 때 활동이 활발하였다. 시와 그림, 글씨에 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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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 고려 후기 유학자인 안향(安珦)의 14세손이다. 서산의 순흥 안씨는 병조판서 안국인(安國仁)이 입향한 이후 수백 년 간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와 양길리 일대에 모여 살았다. 순흥 안씨는 서산의 토성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 조선 초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안만흥(安萬興)은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에서 태어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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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안천년(安千年)은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솥을 여러 개 걸어 놓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골라 드시게 하였다. 넉넉한 양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자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나누었다. 안천년은 또한 아버지를 위해 후처를 구해 드리고자 노력하였는데, 하루는 여자 거지가 동냥자루를 들고 찾아오자 대문 밖으로 나가 큰절로 맞이하였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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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에 있는 산. 연화산은 성연면, 지곡면, 팔봉면 세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연화산 북동쪽과 동쪽에는 큰 골짜기가 있다. 북동쪽 골짜기는 지곡면 화천리이고 동쪽 골짜기는 성연면 오사리이다. 골짜기 사이의 능선이 면의 경계가 되는데 연화산은 서산 지방의 문화권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이 경계에 있는 봉우리가 대치봉이며, 대치봉에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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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열녀(烈女)와 열부(烈婦). 전통적으로 열녀란 남편이 죽어서 개가할 수 있는데도 개가하지 않는 여인을 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주로 상층 지식인들이 엮은 한문본 『열녀전(烈女傳)』에는 대체로 남편을 따라 죽은 소위 종사(從死) 여인들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어, 결과적으로 열(烈)과 죽음을 밀접하게 연계시키는 관습을 만들었다. 열녀 개념의 변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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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석남동에 있었던 조선 시대 관청의 전답으로 왕자에게 소속된 토지. 왕자제(王子堤)의 둔전(屯田)은 서산시 석남동 망운대 아래에 위치한 둔전으로, 왕가(王家)의 대군(大君)에 소속된 궁의 전답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에 어떤 대군에게 소속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둔전은 고려 때부터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로, 왕자제의 둔전 역시 같은 목적으로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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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孔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유교(儒敎)는 공자 및 맹자(孟子), 주자(朱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유교에도 중심 경전이 있지만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교조화된 신앙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즉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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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유생. 본관은 서령(瑞寧)[서산]. 아버지는 유침(柳忱)이다. 유민수(柳敏遂)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서 살면서 공부하였던 유생이다. 풍채가 좋고 마음 씀씀이가 공명정대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거짓이 없었다. 1582년(선조 15) 고경명(高敬命)이 서산군수로 부임한 뒤 서산 군내 20세 이하의 청년 30여 명을 뽑아 가르쳤다. 이들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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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서령[서산]. 증조할아버지는 조선 초 천문학자였던 유방택[류방택, 柳方澤]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유백순[류백순, 柳伯淳]이다. 서산의 토착 성씨인 서령 유씨 중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관직을 버리고 은둔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유백순-유사종(柳嗣宗)으로 이어지는 서산 지역의 서령 유씨들은 여말 선초의 절의계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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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관아의 서리. 유윤당(柳潤塘)의 가계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호산록(湖山錄)』에 ‘전춘(全春), 경준(景俊) 형제도 비록 서리라고 하나 천성이 양순하고 착하여 집에 살면서 모친을 봉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리들이 모두 피란을 가 버렸지만 구실아치인 유윤당은 서산 관아에 남아 예부터 전해져 오는 문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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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충신. 본관은 서령[서산]. 자는 입부(立夫). 서산의 유력 성씨인 서령 유씨 유백순(柳伯淳)[?~142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진사 유방익(柳邦翼)이며, 형은 유경립(柳景立)이다. 유지립(柳之立)[1555~?]은 1575년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1579년(선조 12) 25세에 생원 3등 54위로 입격하였다. 사마방목에 나타나는 서산 거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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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유학자. 유형손(柳亨孫)은 1480년(성종 11)에 서산에서 태어났다. 품은 기질과 용모가 수려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평생 천성이 강직하고 의젓하며 행동하는데 법도가 있고 점잖아 도리를 잃지 않으므로 큰일을 잘 결정지을 수 있었다. 때문에 향당 사이에 결정짓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모두들 찾아와 유형손에게 의견을 묻고 수렴하여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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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서령[서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유백순(柳伯淳)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강진현감을 지낸 유억수(柳億壽)이다. 서령 유씨는 고려 시대 이래로 서산에 자리 잡은 토착 성씨이다. 유흡(柳洽)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유억수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먹게 하였다. 또 종기가 나서 침과 약으로 치료해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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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열녀. 이검손(李儉孫) 처 덕비(德妃)는 어려서부터 북소리와 피리 소리가 들려도 잔칫집에 가지 않았을 정도로 정숙하였다. 이검손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고, 살다가 스물다섯에 남편을 잃었다. 삼년상을 치르는 사이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그만할 것을 권했으나 기어이 기한을 지켰다. 사람들이 위로할 때마다 덕비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잃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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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이다. 변성군은 정종(定宗)[1357~1419]의 10남인 덕천군(德泉君)의 증손자로, 광주목사를 지낸 서산 송씨 송효명(宋孝命)의 손녀와 혼인한 후 처가가 있는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로 거처를 옮겨 서산의 전주 이씨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전주 이씨 후손들은 서산시 수석동과 음암면 신장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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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이수(李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성품이 강직하여 성실하게, 도리를 지키며 살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30여 년 간 옥천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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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전주 이씨 사족. 본관은 전주. 전주 이씨 덕천군파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유인(李惟仁)이다.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고 아들은 이호익과 이우익을 두었다. 장남 이호익은 사마시 생원에 급제하였고, 차남 이우익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올랐다. 이순(李淳)은 향촌에 살면서 사족을 단속하고 향촌의 질서 유지에 힘썼다. 『호산록(湖山錄)』에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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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증조할아버지는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이고 아버지는 이유직(李惟直)이다. 이계연이 광주목사를 지낸 서산 송씨 송효명(宋孝命)의 손녀사위가 되는 연원으로 서산에 입향하게 되었다. 이원길(李元吉)[1580~1636]은 무과 급제 후 초계군수, 함종현령, 봉산군수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봉산군수 재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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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중약(仲約).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이학수(李鶴壽)이다. 동생은 충청병사를 지낸 이유직(李惟直)이다. 이유검(李惟儉)[1538~1592]은 1564년(명종 19)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찰사 김수(金睟)는 초계군수 이유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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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정종의 6세손으로 전주 이씨 덕천군파 종실의 후손이다. 부인은 경주 최씨이다. 아들은 이순(李淳)이고, 손자는 사마시 생원 이호익과 문과 급제 후 병조정랑에 오른 이우익이다. 이유인(李惟仁)은 서산의 음암면 신장리와 도당리에 모여 살았던 전주 이씨 덕천군파 종실의 후손이다. 문관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냈다. 그는 향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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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이다. 어머니는 서산 정씨로 광주목사 송효명(宋孝命)의 손녀이자 참봉 송유징(宋有徵)의 딸이다. 이이수(李頥壽)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판서 권극지(權克智)에게 시집보냈다. 외손녀의 남편은 좌의정에 오른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이다. 이정구의 가문은 3대가 대제학을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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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운몽(雲夢).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宣城君)의 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증직된 이정방(李定邦)이며, 아버지는 참판 이진백(李震白), 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동생은 이연(李沇)이다.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는 전주 이씨들의 동족 마을로, 이곳에 세거하는 전주 이씨를 속칭 ‘예미 이씨’라고도 부른다. 전주 이씨가 서산시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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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이택(李澤)을 기리는 신도비. 이택[1651~1719]은 정종(定宗)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宣城君)의 후손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택 신도비는 1731년(영조 7)에 건립되었다. 운산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647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1㎞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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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열녀. 아버지는 방동(方同)이고, 남편은 이희석(李希石)이다. 아들은 이무안(李武安)이다. 막개(寞介)는 이웃 마을에 사는 이희석과 혼인하였다. 이희석은 활을 잘 쏘아 사수(射手)로 뽑혔는데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다쳐서 죽었다. 막개는 가난한 살림에도 지극정성으로 남편의 삼년상을 치렀다. 제사도 정성껏 지냈다. 바른 몸가짐으로 수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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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충청남도 서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전국을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조선은 관군과 각처에서 모집된 의병 등이 총력전을 펼쳤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명(明)이 개입하여 조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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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李翰)을 시조로 하고 창령군(昌寧君)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의 세거 성씨. 전주 이씨는 서산의 유력 성씨로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1421]의 둘째 아들 창령군[1389~?]의 후손과, 덕천군(德泉君)[정종의 10남]의 증손 변성군(邊城君) 이계연의 후손 등이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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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당시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사족들이 일으킨 의병 운동.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서산 지역에서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여러 군현과 마찬가지로 서산의 사족들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관리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산록(湖山錄)』에는 정유의병을 일으킨 사람들로 유흡(柳洽)·곽설(郭說)·한효순(韓孝純)[154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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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평양(平壤). 아버지는 정로위(定虜衛)를 지낸 조경록(趙景祿)[1542~?]이다. 조안방(趙安邦)은 서산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수레를 호종하였다. 선조의 행차가 영유[현 평안남도 평원군]에 이르렀을 때 특별히 실시한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선전관겸비변사낭청(宣傳官兼備邊司郞廳)을 역임하였다. 안동판관(安東判官)에 부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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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군수를 지낸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할아버지는 증판서 조연손(趙連孫)이고 아버지는 조준수(趙俊秀)다. 부인은 용인 이씨로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둘째 아들은 병조판서를 지낸 조계원(趙啓遠)이다. 조존성은 증좌찬성 조남(趙擥)에게 입양되었다. 조존성(趙存性)[1554~?]은 성혼(成渾)·박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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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양주. 자는 선계(善繼), 호는 청호(聽湖). 할아버지는 좌참찬 조사수(趙士秀)이고, 아버지는 조지(趙摯)이다. 조존세(趙存世)[1562~?]는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0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예문관봉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한성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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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유학자. 조회영(趙懷瑛)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영암군수을 지낸 조경록(趙景祿)이고, 둘째 아들은 부여현감을 지낸 조경희(趙景禧)다. 조회영의 형 조회침 역시 재주가 좋고 기개가 높았던 인물로 21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조회영은 서산 읍내에 살았다. 용모가 단정하고 의젓하였으며, 근검절약하여 재력가가 되었다. 애써 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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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 지곡이 본관인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호산록(湖山錄)』,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서 서산과 관련된 지리지 성씨 조에는 서산과 지곡의 토성으로 문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본관은 분명치 않지만, 서산이나 지곡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호산록』에 등장하는 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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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의 세거 성씨. 진주 강씨는 지리지 및 읍지의 성씨조에 등재되지 않은 데다, 관련 기록도 부족하여 서산에 입향한 시기를 추적하기가 어렵다. 다만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의 인물 기록 중 강몽서(姜夢瑞)의 본관이 ‘진주’로 확인된 점을 고려하면 이 시기부터 서산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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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란(韓蘭)을 시조로 하고 한정덕(韓正德)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청주 한씨는 서산의 유력한 세거 성씨로 서산의 사찬읍지인 『호산록(湖山錄)』을 찬술한 한여현(韓汝賢)의 가문이다. 『호산록』을 비롯해 서산의 지리지와 읍지 인물조에 등장한다. 서산의 청주 한씨는 원래 본관이 면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에서는 1500년대 이후 크게 번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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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달제(崔達悌)[1669~1731]는 서산의 지곡면 독주동(犢走洞)[현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 애현마을 동남쪽]에 살았다. 부모가 희귀한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니 하루는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약이 있는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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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 훈련참봉을 지낸 최몽전(崔夢鸇)이 아들이다. 최린(崔麟)은 무과에 급제한 후 남포현감[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을 지냈다. 고향인 서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친족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매사 온유하고 겸손하여 많은 고을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고 한다. 아들이었던 최몽전은 훈련참봉을 지냈으나 재상에게 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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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통일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일진(崔日鎭)[1727~1781]은 효심이 깊어 정성과 예로써 부모를 섬겼다. 아버지가 병들자 6년 동안 백방으로 치료법을 수소문하였다. 부모의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는 그 상태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부모가 죽어 장사를 지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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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이자 공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이고, 할아버지는 최영호(崔永灝), 아버지는 전첨(典籤) 최수진(崔秀珍)이다. 어머니는 이세신(李世臣)의 딸이다. 최흥원(崔興源)[1529~1603]은 1555년(명종 10) 소과를 거친 후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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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충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나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친 인물을 일컫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한 서산 출신의 충신으로는 김호열(金好說)[1534~?], 이유검(李惟儉)[1538~1592], 강효윤(姜孝胤), 유지립(柳之立)[1555~?], 문성해(文成海)[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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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팔봉면(八峰面)은 면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팔봉산(八峰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1619년(광해군 11)에 간행된 『호산록(湖山錄)』에 의하면 “팔봉산은 군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여덟 봉우리가 기이하게 산 위에 나열되어 있으므로 팔봉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그 유래를 설명해 주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영풍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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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던 의례. 팔봉산 기우제는 조선 시대 때에 날이 가물면 지방관[서산군수]이 팔봉면의 주산인 팔봉산(八峯山)[해발 361m] 상봉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행하였던 제사이다. 팔봉산은 서산시의 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산이다. 기암 기석으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팔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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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趙椿)을 시조로 하고 조아(趙雅)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평양 조씨의 시조는 조춘으로 고려 시대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를 지냈다. 당시 남송(南宋)에 들어가 금(金)나라를 정벌한 공로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조춘의 선조는 중국에서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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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땅과 자연 형세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인간의 삶이나 죽음과 관련된 장소, 가령 묘지, 가택, 관청, 사찰, 마을, 도시, 수도 등의 입지 선정 및 방위 배치, 공간 구성 등에 사용해 온 한국의 전통 지리학이자 공간 인식 체계이다. 풍수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자연환경 그리고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 등에 관심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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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인. 본관은 청주. 자는 희중(熹仲), 호는 우재(愚齋). 증조할아버지는 한서정(韓瑞貞)이고, 할아버지는 한윤련(韓允璉), 아버지는 충순위를 지낸 한익(韓翼)이다. 아들은 한경춘(韓慶春)이고, 손자는 한여현(韓汝賢)[1571~?]이다. 한영희(韓暎憙)[1518~?]의 진사 급제 사마방목에는 본관이 ‘면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면천은 서산과 인접한 당진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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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향리. 본관은 면천. 고려 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한자희(韓自禧)의 후손이다. 아들 한인국(韓仁國)[1552~?]은 1591년(선조 24) 신묘식년시에 생원 3등 24위로 급제하였다. 한우(韓雨)는 서산 지역에서 여러 해 구실아치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지냈다. 공평하게 일처리를 한 덕분에 그가 호장을 지내는 동안 구실아치들 사이에 잡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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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한서정(韓瑞貞)이다. 한서정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었으나 가지 않아 귀양살이를 하였다. 후에 북방우후(北方虞侯)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영의정을 지낸 이배(李裵)의 딸이다. 부인은 문화 유씨로 현감을 지낸 유석정(柳碩汀)의 딸이다. 서산의 청주 한씨는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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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서산 지역의 세거 성씨인 청주 한씨의 입향조. 본관은 청주. 아버지 한홍서(韓洪瑞)는 고려 충선왕 때 벼슬이 판도판서(判圖判書) 추밀원직학사에 이르렀으며,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원나라의 관저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산 지역에서 청주 한씨의 가계를 잇는 것은 한정덕(韓正德)의 아우인 한정수(韓正粹)의 후손들로, 한서정-한윤련(韓允璉)-한익-한영희(韓暎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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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 청주 한씨의 입향조. 한효순(韓孝純)[1543~1621]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1590년(선조 23)에 파직되자, 같은 해 8월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에 은거하였다. 이 일대에 선대에 하사 받은 땅이 있었는데 작은 농사(農舍)를 짓고 정착했다고 하며, 서산 강씨 강효윤(姜孝胤)의 딸을 후취 부인으로 맞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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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 백제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1619년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에는 산길사(山吉寺)라고 하였다. 1726년 원통전에서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제작되었으며, 원통전에 「삼길산 해월암 중수기」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조선 후기까지는 해월암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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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에서 풍속 교정과 향리 규찰 등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구. 향서당(鄕序堂)은 조선 전기에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 기구이다. 이를 유향소(留鄕所)·향사당(鄕射堂)·향청(鄕廳)·향소청(鄕所廳) 등이라고도 한다. 서산에서는 유향소를 향서당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가 『호산록(湖山錄)』에 기록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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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편찬된 향토의 지리, 역사, 사회, 전승(傳承) 등에 관한 기록. 향토지는 향토에 관한 다방면의 정보를 기록한 자료로 조선 시대의 읍지와 지리지, 현대에 제작된 군지와 시지, 그리고 읍지·면지 등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지리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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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의 별호(別號). 서산이 호산(湖山)으로 불리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원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서산의 또 다른 이름은 기군(基郡)·부성(富城)·서령(瑞寧)·서주(瑞州)이며,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호산에 대한 고증은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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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경춘(韓慶春), 한여현(韓汝賢) 부자가 편찬한 충청남도 서산의 사찬 읍지. 기본 체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따르고 있지만, 목차는 세분되어 있으며 내용이 훨씬 상세하고 여기에 지역과 지역민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 전기부터 1500년대까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데 충청도에서 발간된 조선 전기의 지역 자료가 극히 드문 실정에 『호산록(湖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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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향임(鄕任).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이다. 외삼촌은 중종 때의 명신 진우(陳宇)[?~1535]와 진식(陳寔)[1519~1568]이다. 황유성(黃有誠)은 오랫동안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 기관인 유향소(留鄕所)의 향임으로 활동하였다.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하는 향임의 역할에 충실하여 백성들에게 불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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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황필대(黃必大)는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치료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산 사람의 피를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7일 후에 죽었다. 황필대는 통곡하면서 10일 동안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았다. 또 직접 흙을 져 날라 봉분을 만들고, 3년 동안 여막에 살면서 조석으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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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효성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자녀. 효자는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기는 자식을 일컫는다. 효(孝)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조선 사회에서는 가정에서의 효도를 국왕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지배 이념으로 보아서 적극 장려했다. 반대로 불효하거나 역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