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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244
한자 講學臺
영어음역 Ganghakdae
영어의미역 Ganghakdae Heights
이칭/별칭 사인암(舍人巖),학사계,시랑대(侍郞臺),병풍바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곡동 명곡천변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영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臺)|명승지
양식 냇가의 암벽에 누대의 별칭과 시(詩)가 새겨져 있음
건립시기/연도 1644년(인조 22)~1649년(인조 27)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명곡동 명곡천변
소유자 국유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명곡동 명곡천변에 있는 조선 중기 양산군수 이여익이 고을 유생들에게 강학하던 대(臺).

[개설]

강학대는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이여익(李汝翊)이 1644년(인조 22)~1649년(인조 27) 양산군수로 재임하면서 고을 유생들을 인솔하여 강학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라고 한다. 이여익은 창녕 사람으로, 자는 비경(棐卿), 호는 수봉(秀奉)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참봉 응원(應元)의 아들이다. 성안의(成安義)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630년(인조 8)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정언·장령·양산군수·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여익강학대 외에도 관가의 창고 옆 연못가에 창포정(菖蒲亭)을 건립하여 여가 때마다 고을 자제들을 강학했고, 군민들은 이여익을 위해 거사비(去思碑)를 두 곳에 세웠다고 한다. 현재 양산시 강서동 교리 양산향교 내에 1649년에 세워진 이여익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강학대는 1733년 이곳을 자주 완상하며 노닐었던 양산군수 이흡(李潝)에 의해 ‘사인암(舍人巖)’과 ‘학사계(學士溪)’라는 명칭이 더해졌다.

강학대는 여러 문사(文士)들이 유람하며 완상하였다. 1986년 발간된 『양산군지』에는 문헌공(文憲公) 월담(月潭) 최황(崔滉)이 이곳에서 유상(遊賞)한 바 있다고 했으며, 또 구계(龜溪) 정인휘(鄭寅暉)와 소계(少溪) 김상원(金庠源)의 한시가 소개되어 있다. 『양산의 누정재지』에는 1876년 9월 양산군수로 부임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가 지은 「사인암에서 노닐다[遊舍人巖]」가 소개되어 있다.

[위치]

강학대명곡동 인성산업㈜ 서편 명곡천변에 위치한다. 지도상에서 강학대명곡동 산4-6림과 산1-5림의 경계 지점에 있다.

[형태]

강학대명곡천변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우뚝 서서 병풍바위라 불릴 만큼 넓게 펼쳐져 있다. 현재 강학대 오른편 아래쪽에는 ‘시랑대(侍郞臺)’라는 글자가 행서로 음각되어 있고, 그 바로 오른쪽에는 시은(是隱)의 7언율시 한 수가 음각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인암은 곧 시랑대인데/ 여러 학사가 왔어도 기록하지 않았네/ 새들은 정을 노래하지만 그 뜻 알기 어려워/ 인적 없는 이 산 속에서 나는 술잔을 멈춘다/ 돌 병풍 우뚝 솟아 산허리는 숨었는데/ 골짝 물은 다퉈 흘러 동구를 열었구나/ 백마같이 빠른 세월, 봄꿈의 자취로다/ 천년 바위에 글을 쓰니 바위가 얼마나 넓은지

정축년 여름에 시은이 쓰다

[舍人巖卽侍郞臺 亦不記諸學士來 有鳥啼情難解語 無人間蹟欲停杯 石屛屹立山腰隱 澗水爭流洞口開 白馬光陰春夢跡 稿千年石石何灰 上元赤牛夏 是隱]”

[현황]

1832년 간행된 『경상도읍지』에는 ‘사인암’과 ‘학사계’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했으나, ‘학사계’라는 글자만이 암벽 중앙의 아래 개울쪽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1993년 여름의 폭우로 각자(刻字)된 바위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시랑대’라는 글자만 남아 있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학사계’ 각자 부분은 현재 양산문화원에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강학대명곡천의 풍광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절벽에 새겨진 각자와 한시는 이곳이 옛부터 문사들이 유람하며 완상했던 승경(勝景)이었음을 알려주고, 강학대라는 명칭은 읍인(邑人)들에게 학문과 심신을 연마하던 강학처로 활용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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