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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297
한자 盤龍齋
영어음역 Ballyongjae Shrine
영어의미역 Ballyongjae Shrin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 화룡마을 73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현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재실
건립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정면칸수 4칸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강서동 어곡리 화룡리 736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강서동 어곡리 화룡마을에 있는 영일정씨 재실.

[개설]

정도만(鄭道萬)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조선 숙종대에 합천에서 화룡(化龍)마을으로 이거하여 영일정씨 화룡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반룡재는 1991년도에 건립된 영일정씨 화룡마을 문중의 재실로 정도만과 그의 후손들을 모시고 있다.

[변천]

반룡재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재기(齋記)가 남겨져 있다. 「반룡재기(盤龍齋記)」의 확인은 다음과 같다.

양산시 강서동 서쪽 땅 어곡(魚谷) 화룡마을에 한 재사(齋舍)가 날개를 편 듯 우뚝 솟아 있으니, 이는 영일정씨가 매해 제사를 모시고 일가가 회합하는 장소로서 그 현판에는 반룡재라 되어 있다. 어곡이니 화룡이니 하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살펴보건대, 물고기가 변하면 용이 되고 용은 비늘 있는 짐승의 우두머리가 된다.

또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반룡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이 오색을 갖추게 되면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그러한 어곡천이 흘러내려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 놓은 듯 아름다운 곳에 다다르게 되니, 이가 화룡마을이다. 재실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흰 바위가 깊은 못을 이루니, 용의 조화가 바야흐로 그 영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반룡대라 이름한 뜻이 어찌 헛되다고 하겠는가?

맞은편 비봉산(飛鳳山)은 항상 길조를 품고 있으니 용과 봉황새의 신령스러운 조짐이 합쳐 여기 이 땅이 되었던 것이다. 양산을 관할하는 관청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 즈음한 곳에 영일정씨의 선대인이 자리잡은 것이 벌써 이백 년이 흘러 자손대대의 고향 마을이 되었다. 산등성이 이어진 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솟아 있으며, 대문과 골목이 서로 이어져 단란한 마을을 이루었으니 북으로는 신불산(神佛山)이 우뚝 솟아 있고 동으로는 여러 봉우리에 합하면서 에워싸여 있다.

골짜기가 깊어 그윽한 경치가 저절로 사계절마다의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었도다. 고려 중엽 지주사 형양공(滎陽公) 휘 습명(襲明)을 시조로 하고 고려 말 문충공 포은(圃隱) 선생의 12세손이 되는 통정(通政) 휘 도만(道萬)께서 합천에서 여기로 옮겨오셨다. 공손하게 의를 행하고 정성을 다해 선조를 모셨으며 옳은 방도로 자식을 가르치면서 8대에 이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힘써 농사지어 제사를 넉넉히 모시면서 밝은 장소에 재실을 짓고자 했으나 겨를이 없어 지금까지 늦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형세를 살펴보니 선조의 남긴 뜻을 잇지 못할까 항상 두려워 조심스러웠는데, 결국 신미년(1991)에 문중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마을 앞에 자리를 잡아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부려 네 칸 집을 짓게 되었는데 양쪽에는 부엌과 창고를 배치하였으며 문과 담장으로 둘렀으니 엉성하지도 사치하지도 않은 중간 규모 정도이다. 제사를 모시는 곳은 대청으로 하고 동쪽 방은 족친을 모아 돈독하게 강론하는 자리로 하였으며, 서쪽 방은 자질을 모아 학업을 익히는 자리로 삼았다.

아!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오랫동안의 소원을 이루었으니 오르내리시는 영령들도 감응하시는 바가 있으리라. 착하도다! 훌륭하도다! 어느 날 족친 가운데 대영(大永), 진화(震和) 두 사람이 내게 찾아와 몇 자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내 그 사실을 들어보니 공사의 시작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그 족친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으니 그 선대에 보답하고 옛 일을 추모하는 정성에 감동하게 되었다. 재실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 내력에 대한 기록이 없을 수 없어 삼가 몇 자 기록하여 일가로서의 성의를 표한다. 단기 4326년 계유년(1993) 중추 족친 헌교(憲敎) 삼가 쓰다.”

[형태]

반룡재는 네 칸 건물로 되어 있다. 양쪽에는 부엌과 창고를 배치했으며 문과 담장으로 둘렀다. 제사를 모시는 곳은 대청으로 하고, 동쪽 방은 족친을 모아 돈독하게 강론하는 자리로 하였으며, 서쪽 방은 자질을 모아 학업을 익히는 자리로 삼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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