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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319
한자 紹景齋
영어음역 Sogyeongjae Shrine
영어의미역 Sogyeongjae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29-1[삼계2길 38]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현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재실
양식 주심포 양식의 목조형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29-1[삼계2길 38]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립된 재실.

[개설]

소경재는 죽림칠현 김칠득(金七得)과 증산(甑山) 박승장(朴承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재실이다.

[변천]

소경재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소경재기(紹景齋記)」와 「현효사이건기(賢孝祠移建記)」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경재기」

“ 양산군 현효사는 김죽림(金竹林), 박증산(朴甑山) 두 분 선생의 제향을 모시는 장소인데, 고을 인사들이 조정에 호소하여 창건한 것이다. 백여 년 동안 향사하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인하여 철거하고, 향사를 철거한 지 6년 되는 갑신년에 위에서 포창하여 증직을 내리는 은전이 있었고, 3년이 지난 정해년에는 석계의 길가에 정려를 건립했으나, 아직까지 재실을 창건하지는 못했으니 역시 우리들의 수치이다.

김선생의 5대손인 전 주정(主政) 상형(尙炯) 씨는 나에게 외구(外舅)인데, 개연히 뜻을 두고 정려의 오른편에 건물을 지어 편액을 소경재라 하였다. 대개 두 분 선생의 행실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이로 인하여 정려를 수리하여 온통 새롭게 하여 환하게 하니, 지난 날과 비교하여 광채가 배나 더할 뿐 아니라 두 분 선생의 전형과 모범이 완연히 그 가운데 계시는 듯하니, 훌륭하지 아니한가!

시경에 이르기를 “효자가 사라지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영원히 혜택을 준다”고 하였는데, 옛사람이 이른바 계술(繼述)을 소중히 여겼음이다. 나의 외구께서는 참으로 능히 계술을 잘하였다 하리라. 공사를 마치고 나로 하여금 글을 지어 기록하라 하기에, 내 비록 감히 하지 못하지만 실록을 여러 번 열람하고 흠모하여 마지않았고, 또 재궁이 새로 완공됨을 다행으로 여겨 위와 같이 기록한다. 경신년 9월 일. 장사랑 전임 평리원주사 밀성 박인표 지음.”

○「현효사이건기」

“영남은 예로부터 공맹(孔孟)의 고장으로 불렸는데,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그 기풍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경신년 나는 황산도(黃山道)의 찰방(察訪)이 되었다. 황산역(黃山驛)은 지역이 영남 산수가 모두 모인 곳이다. 웅장하게 치솟아 혼후하고 널따랗게 물이 고여 깊고도 맑으며 은은히 커다랗고 맑은 기운이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출몰하여 참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하루는 아전이 책자 하나를 들이는데, 곧 현효사(賢孝祠)에 향사하고 있는 박증산(朴甑山) 김죽림(金竹林)의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듬어 열람했더니, 박의 호는 증산 인데 효도와 우애로 몸을 단속하고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예에 밝았다. 김은 호를 죽림이라 하였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눈 먼 어머니가 시력을 찾았으며, 그 밖에 행실이나 처사가 모두 잘 익은 선비의 궤도를 벗어나지 아니했으니, 얼마나 훌륭한가!

또한 가난한 집에서 생장하여 아전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능히 우뚝하게 자립하여 사람의 기강을 진작하고 무너진 풍속을 깨우쳤으니, 진실로 저 영특하고 신령하며 맑고 밝은 기운에 모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할 수 있겠는가! 당시 양산군과 황산도의 책임자가 서로 잇달아 부임하여 맨 먼저 두 현인의 사적을 묻고는 혀를 차며 감탄하여 마지않고서, 혹은 글로 그 사적을 서술하기도 하고, 혹은 그 집에 찾아가 그 사람을 살펴보기도 하여, 그대로 각기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또 조정에 품의하여 그 부역을 덜어주고 그 복호를 하였으니, 이는 조종조에서 함양하고 보살피며 배양한 힘이 진작시킨 것이라 어찌 훌륭하지 아니하냐!

죽으면 향사에서 제사한다는 것은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사당은 순치(順治) 연간에 건립되었는데 찰방의 역사와 마주하여 설치되어 관청의 힘으로 도운 것이 많았다. 사당의 이름은 죽봉(竹峰) 김공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건하게 받들며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본 역의 사람들이다. 비록 모두 문서 작성의 일을 하고 있지만 왕왕 문학이 있는 자도 있고 삼가 신칙하는 자도 있으며 청렴하면서 일을 감당하는 사람도 있어서 표표하게 칭송할 만한 이가 많으니, 남긴 혜택이 사람들 깊숙이 들어감이 이러한 것이다.

병진년에 역사가 큰 물결에 무너져 그 해 겨울에 북쪽으로 삼십 리 되는 상삼리로 옮겨 설치하였다. 역사가 이미 옛 곳을 버리고 새 곳으로 갔으니 사당만 황폐하고 적막한 물가에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 재명년 기미에 재물을 모으고 기술자를 모아서 마침내 그 사당을 새 역사와 몇 걸음 떨어져 마주 보는 곳으로 옮겼는데, 실은 공사를 하기 어려웠으나 뭇 사람들의 마음이 성이 되어 금석이라도 뚫을 듯하여 모두 몇 개월에 공사를 마쳤으니, 얼마나 주밀하게 신속하였던가!

사당 건물이 날아갈 듯 환하고 재실과 익랑채는 정정하고 방방하여 그 평탄하고 시원한 모습은 예전 터보다도 훨씬 낫다고들 한다. 또 그 해 10월 보름에 여러 선비들을 모아 낙성하였다. 하루는 양산의 군수 이휘정(李彙廷) 군과 상사(上舍) 안행준(安行準) 씨가 빈객으로 찾아왔고 또한 상향(上鄕)의 족친으로 참석하러 온 자도 있었다. 고시(考試)하는 여가에 간간히 담화를 하였는데 또한 한바탕 좋은 일이었다.

자리가 따뜻해지자 모두가 말하기를, “이 놀이는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또한 저 아전들을 보니 마음을 한결같이 하나로 하여 부지런하고 삼가며 질박하고 정직하여 마치 형벌을 신중히 하여 다스리기 쉬운 듯하다. 현효의 유풍을 아직도 말하고 생각함이로다” 하였다. 나는 이에 그 말대로 다시 격려하였다.

원컨대 그대들은 마음가짐이나 행동이나 한결같이 금일을 표준으로 하여 계속하여 계승해 나가 변함없이 이어나간다면 한 지방의 교화를 일으킴에 족할 것이고 또한 앞 사람들에게도 광채가 있을 것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글에 주변 풍경과 경치를 이야기할 것은 없으므로 생략하였다. 신유(辛酉) 10월 상한(上澣) 독우(督郵) 김락연(金樂淵) 씀.”

[형태]

소경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다. 건물은 기단 없이 마당 높이와 같게 올렸다. 팔작지붕과 겹처마의 건물 내부 마루 끝 위에 가운데 현판이 걸려 있으며, 왼쪽 작은 방 앞에도 현판이 걸려 있다.

출입문에서 바로 보이는 비각은 팔작지붕과 주심포로 된 정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 건물이다. 비각 안과 바깥에는 벽화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6개 기둥의 윗부분은 나무로 되어 있고, 아래는 돌로 되어 있다. 내부에 두 기의 비가 있으며, 천장 가운데에는 고서를 넣는 함이 있다. 또 내부 오른쪽에는 ‘현효사(賢孝祠)’와 ‘명륜당(明倫堂)’이라는 2개의 현판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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