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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169
한자 權銀海
영어음역 Gwon Eunh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우정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주의운동가|여성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군 기장읍 동부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성별
생년 1903년연표보기
몰년 1994년연표보기
대표경력 조선부녀총동맹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활동사항]

권은해는 1903년에 지주였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부친 권상중(權商重)과 모친 강처일(姜處一) 사이에서 1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권은해의 아버지는 개인 재산으로 기장의 사립 학교인 보명학교와 명정의숙을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지역의 인재 양성 교육에 기여하였고, 지역의 유지, 지주들과 함께 ‘광복회’란 단체를 조직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권은해는 명정의숙을 다니면서 항일 의식을 지니게 되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즉각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각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 속에서 청년 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기장에서는 1921년 4월 기장기독청년회가 설립되었고, 6월에는 기장여자청년회와 여자노동야학이 설립되었다. 권은해는 두 여성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1921년 10월 양산 출신의 이상복과 결혼하면서 활동의 무대를 기장에서 양산으로 옮긴 뒤, 1922년 8월 30일에 양산부인회를 창립하였다. 1929년 6월에는 양산근우회가 창립되는데, 권은해는 창립대회 때 대회 의장을 맡아 여성 운동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31년 양산농민조합이 창립되었을 때 농민조합 부녀부장의 일도 맡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권은해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자로 활동하였는데, 해방이 된 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로 변신하였다. 또한 생활의 근거지를 부산으로 옮겨 조선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하고 공산당 조직에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점차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서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1946년 11월 남로당이 출범하여 결성한 조선부녀총동맹의 위원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여성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평양의 사동에 있는 간부학교에 입교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사리원의 고아원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에서 피신해 있다가 1955년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67년 석방되어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와 염원하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94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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