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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568
한자 車原頫
영어음역 Cha Wonbu
이칭/별칭 사평(思平),운암(雲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충신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
성별
생년 1320년연표보기
몰년 미상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충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아버지는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이다.

[활동사항]

차원부는 1320년(충숙왕 7)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후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학자로서의 명성이 포은 정몽주나 야은 길재와 함께 높았다.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차원부는 출병에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차원부를 공신으로 책록하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이어 정언(正言)·판농시사(判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원부는 일찍이 정도전하륜 등이 연안차씨 외손의 서손(庶孫)임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정도전하륜 등의 원한을 받아왔다.

차원부가 벼슬을 등지고 황해도 평산군 지역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륜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과 일행 80여 명이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절의를 지켰던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의 그림에 뛰어났다.

[학문과 사상]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로 고려가 망한 후 벼슬을 버리고 평산(平山) 지역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숨어 살았다. 태조 이성계가 차원부를 찾아오자, 차원부는 개국녹훈(開國錄勳)에 들어갈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하면서, “술찌꺼기기를 먹었으면 먹었지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겠다.”라고 하여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저술 및 작품]

차원부의 행적을 적은『운암실기(雲巖實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세종황보인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侍中)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운암사(雲巖祠)에 제향 되었으며, 덕원사원(德源祠院)과 오천사원(鰲川祠院)에도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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