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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479
한자 鄭駿謨
영어음역 Jeong Junmo
이칭/별칭 춘전(春田)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인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성별
생년 1860년 7월 13일연표보기
몰년 1935년 5월 23일연표보기
대표경력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장로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시 출신의 종교인.

[개설]

춘전(春田) 정준모는 두 살 때인 1862년 부모를 잃고 불우하게 성장했으나 한학에 전념하였고, 한때 불교에 귀의하여 양산 통도사, 청도의 운문사(雲門寺), 강원도 횡성의 구룡사(龜龍寺), 예천의 용문사(龍門寺) 등지로 전전하다 1882년에 양산으로 귀향하여 지물포를 경영하기도 했다.

24세가 되던 1884년 혼인하였고, 26세 때인 1886년에는 하급 공무원인 이방(吏房)에 들어갔다. 33세 때인 1893년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고, 1902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올랐다. 1906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서울 연동교회 선교사 게일과 접촉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 전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어 관직을 버리고 양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성경 내용을 한시로 저술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양산 지역 기독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양산 지방 최초의 장로로 양산교회에서 시무하였고, 물금교회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교역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5년 5월 23일(음력 4월 20일) 75세를 일기로 경상남도 양산군 물금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활동사항]

양산 지방 첫 교회인 양산교회 설립에 관여하였다. 1906년 4월 호주 선교사 손안로(孫安路, A. Adamson)의 순회와 전도에 힘입어 교인 10여 명과 함께 양산 북부리에 양산읍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 후 신도가 이영헌, 금석호 외 20여 명으로 늘어나자, 남부리에서 한문사숙(漢文私塾)을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부산에 있던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어을빈(魚乙彬)[Charles Irvin, 1862-1935]과 교분을 나누면서 부인 베타(Bertha)가 설립한 규범학교(閨範學校)에서 1907년부터 2년간 한문 교사로 협력하면서 이 지역 기독교 운동에 기여하였다. 규범학교는 학문과 기초 산술 등과 예절을 가르치는 학교였는데, 정치인 박순천, 소설가 김말봉 등을 배출하였다.

1911년부터 5년 동안 양산군 지역과 김해, 구포 등 10여 개 지역 교회의 합동 조사(助事)를 맡았다. 1915년에는 김수환과 함께 양산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장남 정진철과 함께 물금으로 옮겨가 양산교회의 도움을 받아 물금면 물금리 459번지에 대지 501㎡, 건평 56.1㎡의 교회당을 건축하여 물금교회를 설립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1923년 봄 양산교회를 비롯하여 인근의 반희교회, 배내교회, 석계교회, 원동교회, 좌삼교회 등 6개 교회를 담당하게 되자, 양산교회 장로였던 정준모주기철과 교류하게 되었다. 여생은 집필 활동으로 보냈다.

[저술 및 작품]

성경 한시집 『경제사율(經題詞律)』(물금야소교회, 1935)이 있고, 미간행 수기본 『계시록약석(啓示錄畧釋)』(1922)과 자전 기록 『나의 파계와 나의 경력』(1922)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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