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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없는 비석골 지킴이의 기억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403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비석골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선장마을이 고향인 심재현(58세) 씨 내외는 10년 전에 이곳 비석골로 이사 와서 비석골 지킴이가 되었다. 어릴 적 천태산 큰골 입구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수량도 풍부했거니와 그 물맛이 기가 막혔다고 한다. 그런데 비석골에 우물을 파고 난 뒤부터는 그 옹달샘의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구언을 만들기 전 바닷물이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는 이곳의 우물 물맛이 대부분 약간 짭짤했다 하는데 비석골 물맛만은 큰골 옹달샘 물맛처럼 좋다고 한다. 그런 물을 먹고 살아서인지 10여 가구밖에 살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면장이 두 분이나 나왔단다. 심씨 내외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도 어쩌면 이 기운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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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골

비석골에는 비석이 없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 말엽에 양산군수를 역임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공적비마저 1986년 지방도 1022호선 확장 때에 가야진사 앞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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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선생의 공적비

1994년에 도로가 확·포장된 데다 교통수단이 발달된 오늘날에는 강 건너 김해로 가기 위해서는 구포나 삼랑진 다리를 이용하지만, 그 이전에는 김해 용당과 양산 용당을 오가는 나룻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또한 2일과 7일에 서는 원동 장날이면 김해 용당을 출발해서 장터가 있는 원동역 너머 나루까지 ‘기계배(동력선을 가리킴)’가 오갔다고 한다. 김해 용당 사람들은 원동장을 보아 살아갔고, 양산 용당의 부녀자들은 강 건너 무척산에 있는 백운암에 치성 드리러 또는 ‘꼬치미(고비의 방언)’ 뜯으러 다녔다. 노 젓는 나룻배가 건너편에 있으면 고함으로 사공을 불러 건너다녔다고 한다.

두 지역이 같은 지명을 쓰듯이 두 용당은 하나의 생활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그런 정신이 남아 있는 듯하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김해 용당에 있는 용산의 목이 잘리게 되자 두 지역 사람들이 집단서명을 받아 탄원을 하여 결국은 그 목을 연결시켰고, 위로금조로 나온 마을 발전기금 또한 3(양산 용당):7(김해 용당)로 나눠 가졌다고 한다.

겨울밤이면 꽁꽁 언 낙동강을 담 큰 남자가 앞장서서 지팡이로 숨구멍(얼음이 얼지 않아 강물이 오르내리는 곳으로 이곳을 밟으면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게 된다)을 확인해가면서 용당나루를 건너 김해 용당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겁 많은 처자들은 얼음 위를 건너지 못해 오도 가도 못하고 일행들이 놀고 돌아올 때까지 강둑에 앉아 기다리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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