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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깨끗한 자연 속에서 병을 이겨낸 사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3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윤한열(69세) 씨는 합천군 용주면이 고향이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부산 토박이와 결혼한 뒤로 부산 사람이 되었다. 처가에서 합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기에 인도네시아 등지로 다니면서 원목 수입을 함으로써 장인을 도왔다.

날로 사업이 번창하자 일선에서 물러나 호주로 이민을 갔다. 7년여를 살다 1986년에 입국하여 장인을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짧지 않은 시기를 해외에서 보냄으로써 사업 감각이 무디어진데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은 원자재 가격을 상승시켰고 원목 생산국의 공급량 제한에 따라 원목 확보가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건설 경기의 둔화로 합판 수요가 급감하는 등 채산성이 악화됨으로써 급기야는 부도를 맞게 되었다.

이때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제조업체였으며 우리나라 10대 회사였던 동명목재마저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부터 강제로 와해당하는 시기였다.

▶ 마을에 이주하면서의 삶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밀어닥친 불행을 이겨내기에 역부족이었던 아내 박기지(66세) 씨가 갑자기 당뇨병에 걸렸다. 공복 혈당치가 200mgdl 이상만 되어도 위험하다는데 그 수치가 500을 오르내렸다. 60㎏의 몸무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48㎏으로 떨어졌다.

ROTC 2기 출신의 윤씨 자신은 강한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가산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옛날의 부귀영화에 비하면 430㎡의 시골집은 말 그대로 코딱지만 한 공간이었다.

마을로 이주한 뒤 사장 사모님이면서 숙명여대를 다닌(결혼으로 학업을 중도 포기했지만) 인텔리이기도 했던 박씨는 이사하자마자 팔을 걷어붙였다. 육체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살아남기 위해서 조간 석간 가리지 않고 모든 신문을 배달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던 들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통도사 서운암 들꽃 축제의 산파역도 맡았다. 처음 들꽃축전을 열었을 때는 사찰에 들꽃이 많지 않아 박씨의 정성이 담긴 들꽃화분들이 상당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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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가꾸기

집 안팎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들꽃 화분들이 왠지 낯이 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으아리랑 인동이 만개하여 과객을 반기고 숱한 꽃눈들이 다음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 들꽃 향기 가득한 박씨 부부의 오막에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가난할지 몰라도 정신면에서는 풍요로움이 넘치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박씨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앓는 이의 모습은 없다. 오히려 어느 누구도 예순 여섯의 아주머니라 믿지 않을 건강미가 넘치고 있다.

한편으로 윤씨는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히 산불감시원 자리를 얻었다.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4월 중순까지 만 5개월 동안 해발 820m에 있는 영축산 산림감시소를 매일 걸어서 오르내리며 산불 감시를 했다. 최근에는 점심값 포함해서 일당이 3만 3천원으로 올라 짭짤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입으로는 늘 빠듯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먹고 사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20㎏ 들이 쌀 한 포면 두 식구가 한 달을 먹고도 남으니 말이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게 사람이라, 많이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한 달에 몇 번씩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곗돈과 애경조사비가 만만치 않다. 지금은 장성한 자녀들로부터 조금씩 도움을 받기도 하곤 해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제적인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자 긴장의 끈이 풀어져서인지 느닷없이 위암이 생겼다. 부도로 파산하면서 받았던 엄청난 스트레스가 긴 세월 잠복했다 나타난 것이리라. 2005년 시월에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 전부를 잘라내었다.

다행히 수술결과가 좋았던 데다 영축산 등반으로 다져졌던 몸이어서 금방 회복이 되었다. 지금은 거의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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