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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길러 네 자녀를 키워낸 농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C0403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정우영(79세)은 이웃하고 있는 삼수리의 시온목장에 이어 양산에서 두 번째로 낙농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곳은 275㎡당 소 한 마리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젖소는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자고 아홉 시간 가까이 풀을 뜯어 먹는데 어미 소인 경우에는 하루 60㎏까지도 먹어치움으로 넓은 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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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79세) 씨

정씨에게는 큰물이라도 져 양산천이 범람하게 되면 수몰이 되어 자갈밭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고구마도 잘 안될 정도의 척박한 토지였지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넓은 땅이 있었기에 농장의 설립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정씨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68년도에 열 마리의 젖소로 낙농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정씨가 낙농을 시작한 당시에는 집유소(集乳所)가 부산에만 있었으므로 우유를 옮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지 않은 양의 우유를 가지러 이곳 양산까지 가지러 오지도 않았거니와, 가져다 줄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교통편도 문제려니와 왕복 차 삯이 우유 값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낙농을 시작한 지 일 년도 훨씬 넘어서서야 집유차가 오기 시작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집유차가 늦게 오는 때면 우유를 찬 샘물에 담가뒀다 건네주었다. 또 교량[효충교]이 없었던 때라 큰물이라도 져서 양산천의 수위가 높아지면 농장으로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는 아예 우유를 집유소에 건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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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효충교]

더구나 젖소를 캐나다로부터 수입하면서 캐나다 달러로 구입했는데 금리의 변동에 따라 갚아야 할 돈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자꾸 늘어가는 듯 했다.

비유량(泌乳量 : 젖이 나오는 양)은 품종에 따라서 다르고, 같은 품종이라도 유기(乳期: 젖이 나오는 시기)가 긴 소가 있는가 하면 짧은 소도 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데, 한 마리의 젖소가 1년 동안에 생산하는 양은 평균 5,000㎏ 정도라고 한다. 비유량은 분만 후 1개월쯤 되면 최고에 달하며 그 후는 점차로 감소해 간다. 계획적으로 분만시키기 위하여 보통 출산 예정 2개월 전부터 건유(乾乳)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어렵사리 농장을 꾸려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농장을 경영한 덕분에 3남 1녀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낼 수 있었다. 큰 아들은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환경부에 근무 중이고, 시의원을 역임한 둘째는 농장을 물려받아 고향을 지키고 있으며, 셋째는 동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농장 땅 대부분이 수용되었다. 그 보상금으로 농장 운영으로 진 빚도 갚고 차액으로 오늘날의 농장 땅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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