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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자금줄, 양산 ‘의춘양행’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201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향토사연구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을 하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와 비례하여 걱정거리도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물질만능주의가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적지 않지만 돈이라는 것이 꼭 나쁘게 이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돈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돈, 그 이하의 가치도 혹은 그 이상의 가치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제시대에 양산에 불어 닥친 근대적 바람에 의한 상회(근대 회사)가 부를 축적하여 독립자금으로 활용됨으로써 나라를 살리는데 이바지했던 돈, 그 이상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1900년대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는 근대적 자본가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각 지역에서는 지역의 지주인 토착자본이 상업 자본에 투자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양산에서도 예외 없이 그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양산 지역에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몇몇 천석꾼(한해 농사를 경작한 수확물이 천가마니(천석)에 이르는 사람)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졌었다.

부산의 유명한 백산상회는 안희제를 중심으로 11명이 참여하였고, 곡물과 해산물을 주요한 취급물종으로 삼았다. 여기에도 양산 지역의 지주들은 자본을 투자하였다. 그리고 양산의 대지주 윤현태와 유력지주로서 양산군 참사인 전석준 등은 일금상회(一金商會)를 설립하였다. 일금상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물종을 취급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부산지역권의 무역상들이 주로 곡물·미곡(쌀)·면포·해산물·위탁매매 등을 취급한 점을 고려할 때 이와 비슷한 물종을 취급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윤현태는 1920년 초반 경에 고향인 양산에 주식회사 의춘양행을 설립하여, 지영진(池榮璡), 추봉찬(秋鳳璨) 등과 함께 경영하였다. 의춘양행은 소비조합은 아니고,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였다. 따라서 의춘양행은 1920년 양산 지역에 존재하였던 대표적 주식회사였음을 알 수 있다. 주식회사 의춘양행은 1923년 3월 의춘신탁주식회사로 명칭을 고치고, 종래의 해륙산물, 위탁매매, 중개 이외에 부동산 매매의 중개 및 대금업, 신탁업을 추가하여 사업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일제시기에 존재하였던 의춘양행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양산을 대표한 근대적 회사였다. 의춘양행이 존재하였던 곳은 지금 중앙동의 번화가, 현 광명유리가 입주해 있는 지역에 있었다. 의춘양행은 단순한 부의 축척만을 위한 회사는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은 의춘양행을 설립하고 일본상품을 배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자금을 대는 활동도 하였다. 양산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다시금 바로잡아 줄 좋은 본보기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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