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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01
한자 古代
영어의미역 Anci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선사/석기,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백승충

[정의]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의 경상남도 양산의 역사.

[개설]

양산 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삼한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야의 영향을 받다가 5세기 이후 신라에 편입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삽량(歃良)으로 불리다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양주로 개칭되었다.

[선사시대]

양산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시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92년 하북정(下北亭)마을 주변 유물 조사에서 주먹도끼로 추측되는 타제석기 1점이 채집된 바 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부터 양산천 주변에 사람이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양산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곳은 없다.

다만, 이웃하고 있는 서생포 등지의 해안변에서 빗살무늬토기와 덧띠무늬토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양산 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 주민들이 씨족을 이루며 살았을 가능성은 크다. 한편,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신기리 지석묘, 평산리 주거지 등 양산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양산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지리적으로 볼 때 낙동강 일대의 경상도 지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한시대]

1~3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 주는 중요 자료는 중국 진(晋)나라 때 활동한 역사가인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이다. 이 자료에는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24개 소국(小國)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양산 지역에 비정될 만한 소국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으로 종래 일부학자들은 양산 지역이 불사국(不斯國)호로국(戶路國)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독로국(瀆盧國)에 비정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독로국이 주목되는데, 부산 동래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로 보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독로국은 지리적 여건 상, 현재의 부산광역시의 기장군과 경상남도 양산시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삼한시대의 양산 지역은 이른 시기부터 김해 지역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보다 큰 정치체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양산패총은 삼한시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생활유적인데, 이웃한 동래패총, 김해패총 등과 함께 농경과 야철 그리고 사슴사냥 등을 통하여 풍요로운 생업 경제를 영위하였던 당시 낙동강 하류 지역의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즉 삼한시대 양산 지역은 낙동강과 바닷길을 이용하여 김해, 동래 등의 인접 지역과 긴밀하게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맺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양산 지역의 남쪽 황산진(黃山津)이 주목되는데, 황산진은 낙동강을 중심 무대로 하여 교역활동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했던 김해의 구야국과 신라가 지속적으로 쟁탈전을 펼치던 곳이었다.

[삼국시대]

삼한사회는 보다 발전한 국가 형태의 삼국시대로 이어진다. 즉 마한이 발전하여 백제가 되었고, 진한이 발전하여 신라가 되었으며, 또한 변한이 발전하여 가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한과 변한은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소백산맥 동쪽의 영남 지방을 남북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경계로, 상호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성장 발전하였다.

이 점은 지정학적으로 보면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 아주 오래전 고대 중국인의 견문에 의해 기록된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 진한과 변한은 서로 뒤섞여 살며, 의복과 언어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비록 낙동강을 경계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강하게 분리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한 후기에 들면서 진한 소국 가운데 가장 큰 정치체인 사로국(斯盧國)은 인근 지역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다. 우시산국(于尸山國)[지금의 울산 지역으로 비정됨]과 거칠산국(居柒山國)[지금의 부산 동래 지역으로 비정됨]도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그 결과 이들 정치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성장하고 있던 양산 지역도 점차 가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라의 영역권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탈해이사금 때에 신라의 장군 거도(居道)가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복속하였다고 전하며, 탈해이사금 21년에는 신라 장군 길문(吉門)이 가야와 황산진 어구에서 싸웠다고 한다. 황산진 어구는 지금의 양산 지역임이 틀림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와 양산조에도 황산강이 나온다. 낙수[낙동강]가 남류와 동류를 하다가 김해 북쪽 옥지연(玉池淵)에 이르러 황산하가 되고, 이것이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김해 남쪽 취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원동리 부근으로부터 낙동강 하구 을숙도 부근까지가 황산하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물금 옆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부르고 있으며, 황산강 상류에 있는 가야진은 신라가 가야국을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였다고 한다. 이처럼 양산 지역은 낙동강 하류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신라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한편, 삼국시대 양산 지역은 가야와의 격전지였을 뿐만 아니라 왜(倭)의 신라 침공 통로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왜는 삽량성(歃良城)을 빈번히 공격해 왔다. 왜가 삽량성을 공격한 이유는 아마 양산 지역이 낙동강 하류를 통하여 왕도(王都) 경주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낙동강 하구 물금 지역에서 양산천을 따라 언양 지역에 이르는 긴 골짜기는 낙동강과 경주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왜구들은 경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삽량성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왜는 낙동강과 면하고 있는 삽량성을 빈번히 공격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시대 양산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북정리 고분군, 신기리 고분군, 삼호리 고분군, 소토리 고분군 등이 있는데, 특히 북정리 고분군의 부부총과 금조총이 유명하다.

[남북국시대]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손을 잡고 마침내 660년 백제, 그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하였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중앙의 지배체제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통치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9주 5소경 제도였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는 전국을 5주로 나누어 지배하였으나, 통일 이후에는 확대된 영토에 걸맞게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재편하였다. 양산 지역에도 9주의 하나인 삽량주가 새롭게 설치되었고, 삽량주 관할 하에는 금관소경과 12군 40현이 있었다. 삽량주의 설치 경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는 665년(문무왕 5)에 종래의 상주·하주의 영역을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었는데, 동쪽 지역을 삽량주라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는데, 양산 지역의 삽량주도 양주로 고쳤다. 양주의 관할은 김해소경을 비롯하여 12군, 34현 6정이었다. 삽량주 시대의 양산은 그 넓이가 수도 경주를 포함한 것으로, 북쪽으로는 영천과 대구 달성, 남쪽으로는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유역인 동래 부산, 서쪽으로는 창녕·마산 일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점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산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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