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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70
한자 驛院
영어의미역 Station Guesthou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시대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개설]

전통시대에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에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 역(驛)은 정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 제공과 빈객을 접대하는 숙박 시설로 설치되었다.

[역참(驛站)]

우리나라 역참은 문헌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권 강화와 함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함으로써 역의 조직도 구체화되고 체계적인 조직망도 확립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전국 역로망 체제로 확립되었다.

역의 수는 고려 때 520여 개소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540여 개소로, 『경국대전』에는 540여 개소로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다소 변천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기도 69개소, 충청도 61개소, 경상도 151개소, 전라도 50개소, 황해도 34개소, 강원도 57개소, 평안도 13개소, 함길도 45개소였다. 조선시대의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12㎞) 간격으로 역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것은 마필(馬匹)이 아닌 도보행정(徒步行程)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고 본다.

역의 기능은 지방 통치를 위한 공문서의 전달, 관물(官物)·세공(稅貢)의 수송 및 관원사행(官員使行)에 대한 마필의 공급과 숙식 제공, 변방군정(邊方軍情)의 보고 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종6품인 찰방과 종9품인 역승을 파견하여, 도내의 역정(驛政)을 관할하게 하였다. 역의 운영을 위하여 마필과 역전 12결(結), 그리고 역마 사육을 위한 마전(馬田)·공수전(公須田) 등을 지급하였다. 역사(驛舍)는 주로 공사방(公事房)·통인방(通引房)·객방(客房)·책실(冊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명나라의 파발제(擺撥制)를 정착시켜 봉수(烽燧)와 더불어 군사 통신 수단의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역의 통신 기능이 일부 파발제에 의해 보완되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역참은 1896년(건양 1) 근대적인 통신 제도와 철도 교통이 점차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됨으로써 결국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원(院)]

원(院)은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원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된 바 있다. 서울에서 개성부·죽산·직산·포천에 이르는 길은 대로(大路), 서울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진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개성부에서 중화, 포천에서 회양에 이르는 길은 중로(中路), 나머지는 소로(小路)로 구분해서 역·관과 인접한 지역에 원을 설치한 것이다.

해당 지역에는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 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인근의 승려·향리·관리를 원주(院主)로 임명했으며, 대로는 5호,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또한, 원의 운영 경비로 충당하기 위해 대로는 1결 35부(負), 중로는 90부, 소로는 45부의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했으며, 지방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고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아울러 하였다.

또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 및 투숙처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원이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백성을 위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이의 운영에 관한 대책을 자주 논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했고, 공용 여객의 숙식을 고을이나 역에서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 후기에는 그 폐해가 많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변천하였다.

[양산의 역원]

조선시대에 양산에는 황산역(黃山驛)·위천역(渭川驛)·윤산역(輪山驛) 등이 있었다. 원으로는 북정원(北亭院)·안정원(安井院)·동원(東院)·범어원(凡魚院)·내포원(內浦院)·성천원(省川院)·호포원(狐浦院) 등이 있었다. 그런데 내포원·성천원·호포원·동원 등은 그 명칭을 볼 때 모두 낙동강이나 내륙 수로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던 원으로 추측된다.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832)에 의하면, 황산역은 양산군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역승(驛丞) 1인을 두었으나, 1510년에 혁파된 된 이후 찰방(察訪) 1인을 둔다고 하였다. 위천역은 양산군의 북쪽 20리 되는 곳에, 윤산역은 안산군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황산역은 양산군의 북쪽 2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정원·안정원·동원·성천원·범어원·호포원 등 여섯 군데 원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관아 건물이 재건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신이 머물 숙소로서 설치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읍지가 간행된 19세기 초엽에는 벌써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상태였다.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이 가운데 북정원은 양산군의 북쪽 5리 되는 곳에, 안정원은 양산군의 동쪽 20리 되는 곳에, 내포원은 양산군의 서쪽, 내포의 북안에, 성천원은 양산군의 북쪽 35리 되는 곳에, 호포원은 호포의 동안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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