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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250
한자 景北齋
영어음역 Gyeongbukjae
영어의미역 Gyeongbukjae Pavilion for Purificatio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 419-1[북정13길 16-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재실
양식 팔작지붕의 현대식 콘크리트식 건물
건립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정면칸수 정면 3칸
측면칸수 측면 1칸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 419-1[북정13길 16-3]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금성나씨 재실.

[개설]

경북재는 1941년 금성나씨 양산 입향조인 북간처사 북헌(北軒) 나이인(羅以仁)과 그 후손들을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후손 나진규와 나기흥이 중심이 되어 나이인을 비롯한 금성나씨 143위를 모시는 재실을 북정과 분암 사이에 세웠다. 금성나씨의 시조는 나총례(羅聰禮)로 고려 혜종정종 때 공을 세워 삼한일등공신 대보국 금성부원군(三韓一等功臣 大輔國 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5세손인 지산처사왕염공(芝山處士王廉公)의 아들 나이인이 양산에 입향하여 금성나씨의 염공파를 이루었다. 나이인은 양산의 충절인 안시명의 손자 사위이며 성리학에 밝았다. 금성나씨 염공파는 현재 북정동 상북정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염공파는 많을 때는 약 50여 호 되었으나, 2004년에는 1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변천]

경북재와 관련된 글로는 묵헌 박천수와 고령 김성도의 양송(樑頌)이 있었다. 현재는 후손인 나기흥의 재기(齋記)가 남겨져 있다. 재기를 통해 경북재의 변천을 유추할 수 있다. 「북정재기(北亭齋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양산군 북쪽의 북정리 마을 뒤에 경북재가 있으니, 우리 북헌 선조를 추앙하여 만든 곳이다. 오호라. 선생은 곧 하동공 여러 선조의 어진 후손이며 매음 선생 현종의 돈독한 벗으로, 가정의 기풍과 범절은 평소에 유래한 바이다. 남계 선생 최공이 한 번 보고는 사랑하여 그의 외손서로 삼았으니 어찌 실상이 없었으면 그리 하였겠는가. 비록 그러한 가승에는 짤막하고 몇 자 되지 않는 글도 없으니 기송에 증빙할 문헌이 없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자손들에게 한없이 큰 한탄이다.

나의 벗 무일재 김성도의 기문 및 상량의 글에는 마을의 북정이란 북으로 호칭을 삼았는데, 북에는 북두성을 에워쌓는 뜻이 있고, 또 그때를 상고하면 병자호란 당시 임금님이 성 아래로 내려와 굴욕의 맹약을 하고 난 뒤인지라, 대명을 위한 절의로 양산으로 넘어 내려왔음이 의심할 게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말과 상반된다. 그러나 우리 가문의 말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을 전해온 것이어서 근거가 없고, 김군의 말은 매음 선생의 의리에 말없이 합치되어 이것으로 고증할 수 있다. 그런즉 김성도는 다른 사람의 덕행을 백세 아래에 잘 말함이니 참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로다.

나는 선생이 세상을 잊어버리는 데 과감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임을 뚜렷이 상상할 수 있다. 나타나고 감춰지는 데는 때가 있으니, 진실을 엄폐할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자손들이 연이어 떨치지 못하여 수양하던 정자는 무너져 없어졌고, 재숙하는 재실은 미처 서두르지 못하여 대대로 유감이 되었다. 나는 재종질 진규와 종군과 같이 여러 일가들과 더불어 자금 염출을 꾀하고 모은 것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정자를 건립하면 분암이 없어서는 안 되겠고, 분암을 건립하면 정자가 없어서는 안 되겠는데, 힘이 미치지 못하여 두 가지를 겸할 수는 없기에, 북정과 분암 사이에다 이 재실을 세우면, 정자 터가 옆에 있고 묘소가 바라다 보이니 이것이 둘을 겸하는 계책이었다.

신사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 윤달에 일을 마쳤다. 집은 모두 칠가반침인데 동과 서의 양쪽은 온돌로 하고, 가운데에 한 칸 반은 정당으로 하고, 뒤로 몇 자 물린 툇마루는 장서실로 하고, 좌우 반침은 툇마루로 하고, 그 처마 끝에다가 아름다운 헌함을 만들어 의지하기에 편하게 하였고, 앞쪽에 행랑 세 칸을 만들어 한 칸은 출입문으로 하였다. 동서로 계단을 쌓아 꽃을 심고 나무를 심어 이씨의 화수의 동산 대로 하고, 괴이한 돌을 두어 태호 형체 있는 온갖 돌을 두었는데, 이는 관상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고상한 기풍과 운치를 백세의 뒤에도 살펴보고, 산소를 바라보며 십리 밖에서 절의를 추모하며, 그 방에 들어가서는 좌우에 계신 듯이 선생을 추앙하는 데는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뒷날 등람하는 자는 눈을 돌려 구경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선생께서 주나라를 높인 의리의 소중함을 알아야만 경북재의 본뜻을 깊이 알 것이다. 단기 4274년(1941) 신사 충주일, 후손 기흥 삼가 기록함.”

[형태]

경북재는 모두 칠가반침으로 동서 양쪽은 온돌로, 가운데에 한 칸 반은 정당으로, 뒤로 몇 자 물린 툇마루는 장서실로, 좌우 반침은 툇마루로 하였다. 그 처마 끝에는 헌함을 만들어 의지하기에 편하게 하였고, 앞쪽에 행랑 세 칸을 만들어 한 칸은 출입문으로 하였다. 동서로 계단을 쌓아 꽃과 나무 등을 심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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