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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322
한자 小魯書院
영어의미역 Sono Private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313-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현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원
양식 목조 건물
건립시기/일시 1835년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313-2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동래정씨 서원.

[변천]

1835년(헌종 2)에 사림이 소산사(蘇山祠)를 창건하여 춘추로 제향을 올려오다가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1929년에 동래정씨 문중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후 상의사(尙義祠)와 강당이 풍우에 퇴색되어 1985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강당을 확장하여 정규 서원의 모습을 갖췄다. 소산사 상량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군(知郡) 이연상(李淵祥) 계사(癸巳) 시월(十月), 오랑캐 나라에도 오히려 갈 수도 있다 함은 그 충성과 공경이 모두 존경받을 만하기 때문인데, 양산 고을에서 어떻게 얻었던가. 그 기풍과 명성은 크게 보답하는데 진실로 합당하도다. 이에 네 번째의 임진년을 맞이하여, 춘추 두 정일(丁日)에 제향하는 사당을 마련하니, 터는 소노(小魯) 가운데에 정하고, 사당은 대동 천하에 이루도다.

공경히 생각컨대 고 침랑(寢郞) 증호부원외(贈戶部員外) 동래 정선생(鄭先生)은 태어나면서 출중한 자질이 있어 공자의 학풍을 듣고서, 어릴 때부터 내 집에 있으면서 내 어버이에게 효도하였으므로 반드시 시서를 배우고 예의를 익힘에 얻음이 있었을 것이요, 장성한 뒤에는 큰 난에 임하여 큰 의리를 판별하였으니 홀로 선비의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유사(有司)가 있는 줄 알았더니, 다행히도 부자(夫子)께서 계셨으니, 그로써 견양(犬羊)에게 붙잡혀갔지만 어느 시대나 현자가 없으리오.

만리 이역의 적국 옥중에서 굽히지 않고 끝내 돌아오니 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네. 고국의 대궐을 그리는 마음 없는 때가 없었으니, 형은 돌아오고 아우는 군중에 있었으며, 간 곳마다 『논어(論語)』읽는 소리 있어 몸은 돌아오고 이름은 바닷가에 남겼도다. 대개 이러한 시대를 뛰어넘은 충신의사는 실로 전 영남 사람들이 살아서 영광으로 여기고 죽어서 애통했던 바이다.

그러나 당시에 이름은 산촌벽지에 잠복되어 있었으니 그 마음과 행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연 송천곡(宋泉谷)과 정충장(鄭忠壯)의 동류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도록 향사에 모시는 예가 없었던가. 만약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할 것을 말한다면 도리어 노교수(盧敎授)와 나상사(羅上舍)의 아래에 있으리오. 인신(人臣)의 도리를 이 신하가 다하였으니 영남 70주(州)의 인사가 흥기하여 추모하고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신주동(神主洞)은 뉘가 주장하였던가. 거의 3백년이 이르도록 그 이름은 사라지고 업적은 묻혀버렸다. 양산이 비록 크다 하나 어찌 부끄럼이 없겠으며, 낙동강이 출렁거리며 흘러가나 응당 한이 있으리라.

임진년에 와서 충절을 살피면서 홀연 대궐에서 교지가 내리시니, 무덤길에 이로써 광채가 나고, 성대한 예식이 향리의 여론에 걸맞아, 이에 감회를 더하여 소리를 합하여 하는 말이 있었다. 저 백록동과 소수서원의 옛 규모를 창건한 것은 곧 자양(紫陽) 주자와 퇴도(退陶) 이선생이 현자를 받드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런 뒤에 군자의 덕이 높으면 경모하는 마음 깊은 것을 볼 수 있나니, 이로써 영예가 있으면 예를 갖추어 신령을 모심이로다.

이제 좋은 손을 맞이하여 잔치하는 자리에 자손들이 두루 탄식하는 말을 기다릴 것 없이 곧장 이곳 양산의 옛 터에다 전년 겨울 모일부터 시작하여 공사를 경영하여 건물을 지음에, 처음에는 일이 너무 거창하고 힘겨운 것 같더니, 웅대하고 화려하게 완성하여 문득 사당을 먼저하고 강당을 뒤로 하였으니, 얼마나 성대하냐! 제향을 올리고 정성을 펼 기약이 있고, 또한 즐겁지 않으리오. 궁장(宮墻)에 우모할 곳이 있도다. 오늘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감회가 이곳에 오니 더욱 간절하다.

봉혜산(鳳兮山) 제일봉 천 길 날아오르는 빛나는 덕은 어제와 같고, 구지동(龜之洞) 깊은 곳에 간직한 아름다운 행적은 지금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반 뙈기의 네모진 연못에 씻으니 어찌 뚜렷한 연원이 없겠으며, 이 사당은 한 줄기 원적산(圓寂山)을 장하게 하였으니 별도로 추앙하여 의지하는 마음 깊이 있었네.

오호라! 북녘 대궐에는 평화로운 시대를 다스리고, 남쪽 변경에는 방비의 자물쇠 굳게 채워 거룩한 임금님 학문을 숭상함이 전재보(錢宰保)의 포충받는 시기를 즈음하였고, 고로(古老)가 사당에 참배하니 마침 한승상(漢承相)의 우애를 보았도다. 그 사람을 어질게 여기므로 그 예를 높이고, 서원으로 받들어서 정성으로써 섬김이 마땅하나니, 사당에 있으면 어찌 부판(負板)의 대의를 생각지 아니하겠으며, 강당에 올라 학업을 강구하면 포로로 사로잡혀 있을 때의 심정을 살펴보기 바라노라.

재목을 모으고 공을 갖춘 것은 이미 우리들이 모두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사업을 잘 이어받을 자는 현량한 후손이요, 한가히 있어 깊이 생각함에 어찌 혹시나 사문이 쇠퇴할까 근심함은 여러 선비들에게 관련된 것이로다. 의관을 정제하고 위의를 갖춘 모습 어렴풋이 당년에 친히 뵙는 것 같네. 봉래산 구름 깊디 깊고 금정산 높디 높아 서로 길이 내세까지 보존하기를 기약하네. 짧은 송사를 가려 들보를 올리는 일을 돕나이다(知郡 李淵祥 癸巳 十月 之蠻邦 猶可行矣 其忠其敬之所共尊瞻 於梁郡 何以得哉 曰風曰聲之允合崇報. 肆當四甲重回之歲 載擧兩丁休享之方. 地占於小魯村中 堂成於大東天下. 恭惟 故寢郞贈戶部員外東萊鄭先生 挺蒼生地 聞素王風 自幼而居吾家孝吾親 必有得於學詩學禮 及長則臨大難辦大義 獨無愧於儒衣儒冠. 始覺有司者存焉 何幸夫子而在也. 所以犬羊之猶爲扶去 何代無賢 乃從犴狴中終焉出來 非君不事. 無時無戀魏闕之志 兄歸弟在軍中 起處起讀魯論之聲 身還名留海上. 盖此度越底忠臣義士 實爲全嶺所生榮死哀. 然當時名潛園陵 夷攷其處心行事 果非松泉谷鄭忠壯之倫歟. 胡沒世禮闕鄕社 若言乎崇德報功 反居盧敎授羅上舍之下矣. 人臣道是臣盡 非無七十州之興慕齎咨 神主洞孰主張 殆至三百年煙名沒蹟. 梁山雖曰奕奕 安得無羞 洛水爲之泱泱 也應有恨. 逮夫黑龍按節 忽焉丹鳳含綸 隧道以之生輝 殷禮旣稱鄕論. 由是增感 齊聲有辭. 粵惟白鹿紹修之創院古規 是乃紫陽退陶之尊賢美事. 然後見君子德隆則慕深 是以有令譽禮備焉靈妥. 玆於嘉賓宴樂之席 無待諸孫周咨之言. 爰卽宜春之古庄 始自前冬之某月. 經之營之乃築 初若事鉅而力綿 輪焉奐焉以成 居然廟先而堂後. 何其盛也 俎豆有展誠之期 不亦樂乎 宮墻有寓慕之所. 而今日俛仰之感 卽此地登臨之間. 鳳兮第一峰 翔千之德輝如昨 龜之洞最深處 藏六之芳躅至今. 洗我心於半畝方塘 那無淵源之的 壯本朝於一抹圓寂 別有依仰之深. 於乎 北關垂裳 南門鎖鑰. 聖主崇學 幸際錢宰保之褒忠 古老拜祠 聿覩漢承相之遺愛. 賢其人故尊其禮 奉以院宜事以誠. 在廟愀思 盍體負版之義 升堂講業 請觀在絏之心. 鳩材僝功 旣出吾黨之咸願 肯構者賢孫 燕居深念 何患斯文之或墜 所關則多士. 冠屨莘莘 威儀棣棣 怳若親見於當年 蓬雲深深 金井峨峨 相期永存於來世. 聊抽短頌 用助修樑).

들보를 들어 동으로 던지니, 선생의 생사가 소중화(小中華)에 있도다. 수백년 지난 임진란 감회가 있기에, 억센 이웃나라 향하여 비로소 새 궁을 짓는다./ 들보를 들어 서쪽으로 던지니, 바라뵈는 옛 학궁에는 가을풀이 처량하다. 당시에 묻히고 사라진 한을 말하지 말라. 이 나라 학문이 흥한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들보를 들어 남으로 던지니, 바다 건너 남방의 연기는 푸르러 남색같구나. 저 곳의 옥수 노인에게 말을 붙여보나니, 논의 한 책이 공의 감실에 있도다. 들보를 들어 북쪽으로 던지니, 후릉의 송백은 얼마나 아득하냐. 신성한 후손 정사를 베풀어 교목나무 그늘 펼쳤으니, 영남의 봄빛은 함께 교화 받는 지역이로다./ 들보를 들어 위로 던지니, 당 곁에 대가 있어 높이는 10장이로다. 한 기운 호탕하여 그 아래 떠오르니, 여기에 오르는 여러 선비 호연지기를 잘 기르리라./ 들보를 들어 아래로 던지니, 평탄한 길에 망망한 들길을 걷도다. 공경 공부 독실히 하여 자리에 올라서야, 연후에 바야흐로 이(夷)와 하(夏)에 행하리라(兒郞偉 抛樑東 先生生死小華中 百年今古龍蛇感 故向强隣始作宮 兒郞偉 抛樑西 望裏古庠秋草萋 莫道當時埋沒恨 此邦興學賴誰兮 兒郞偉 抛樑南 隔海蠻煙碧似藍 寄語那邊玉水老 魯論一部在公龕 兒郞偉 抛樑北 厚陵松柏杳何極 神孫展寢喬陰舒 嶺外春光同化域 兒郞偉 抛樑上 堂畔有臺高十丈 一氣浩然其下浮 登玆諸子善吾養 兒郞偉 抛樑下 平塗脚踏茫茫野 勉君篤敬地頭躋 然後方行夷與夏).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에 풍성은 추로(鄒魯)에 전하고, 예식을 춘추에 거행하며, 사당을 세운 여론을 살펴보면 뉜들 공자(孔子)의 법을 배우고자 아니하겠으며, 선비를 만드는 공부를 넓혀서 내 장차 무성(武城)의 현가(絃歌) 소리를 들으리라. 경영하여 만든 경계 시원하고 한가함은 이곳에서 놀고 쉬려함이 아니니 오직 자제들은 뭇 현인처럼 힘쓰도록 하고, 정성들여 모신 사당 모습 가까이 있으니 어찌하여 나아가 닦고 수양함을 배우지 않으리오. 너희 부형들과 더불어 도를 강론하여 이 만황(蠻荒)의 가까운 곳에서 문헌의 꽃다운 명성을 길이 드리워라(伏願上樑之後 風傳鄒魯 禮擧春秋. 究立祠之輿情 孰不欲誦法孔子 恢造士之功令 吾將聞絃歌武城. 經法之境落淸閒 匪直爲此游息 惟子弟勖哉衆賢, 揭虔之廟貌密邇 何莫學夫進修 而父兄與之講道. 俾此蠻荒之近地 永垂文獻之芳聲). "

[형태]

소노서원은 상의사·정교당(政敎堂)·연경당(硏經堂)·강례실(講禮室)·서대(西黛)·동루(東樓)·삼문(三門)을 갖췄다.

[현황]

임진왜란 때의 공신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과 정호의(鄭好義) 형제의 우국충정의 얼을 기리기 위해 동래정씨 문중에서 서원을 짓고 매년 가을에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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