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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391
한자 忠烈祠址
영어의미역 Chungnyeolsa Temple Site
이칭/별칭 충렬사지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327-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영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우(祠宇)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1696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읍성터 내 동쪽[양산시 북부동 327-2양산문화원 인근으로 추정]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읍성터 내에 있던 조선 후기에 세워진 임진왜란의 충의지사 조영규백수회의 사우 터.

[개설]

조영규(趙英圭)는 자가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稷山)으로, 1554년(명종 9)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58세로 순절하였다. 1669년(현종 10)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1696년(숙종 22) 양산의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백수회(白受繪)는 자가 여빈(汝彬), 호가 송담(松潭)이며, 본관은 부여(扶餘)다.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붙잡혀 갔다가 9년 만에 방환되었다. 피랍 시절 왜적에게 끝내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감탄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폐모론(廢母論)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인조반정 후 자여찰방(自如察訪)을 역임하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권만(權萬)은 1728년(영조 4) 무신난 때 창의모병(倡義募兵)하여 역도들을 물리쳤다. 1747년(영조 23) 양산군수로 도임하여 양산의 5곳에 있는 봉산(封山)이 허다한 병폐를 양산하자, 이를 도백(道伯)에게 알려 4개의 봉산을 혁파시켰다. 이에 1788년(정조 12)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합향되었다. 그의 「무신창의격서(戊申倡義檄書)」와 「파봉산장(罷封山狀)」이 『양산군지』에 실려 있다.

[변천]

충렬사조영규백수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96년(숙종 22) 양산군수 조무훈(曺武勛)에 의해 양산읍성 내의 동쪽에 세워졌다. 그후 1788년(정조 12)에는 영조 때의 양산군수 권만이 추가로 합향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자, 1870~1873년 양산군수로 재임한 손상일(孫相馹)을 중심으로 철거된 충렬사 자리에 호조참판 조공비(趙公碑)를 세우고 치제(致祭)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치제는 중단되고 조공비는 양산시 북부동 옛 양산군청 뒤 느티나무 고목 아래와 논밭에 버려져 있었다. 이 비석은 해방 이후 양산 춘추계(春秋稧)에 의해 다시 수습되어, 1949년 준공된 양산시 강서동 춘추원(春秋園)의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 일명 장충단)에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충렬사양산읍성 내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빈 터만 남아 있다. 충렬사에 모셔져 있던 조영규는 현재 삼조의열단에 신라 박제상(朴堤上)과 고려 김원현(金元鉉)과 함께 향사되고 있다. 삼조의열단의 향사는 양산향교에서 주관하여 매년 음력 4월 15일에 거행된다. 백수회는 1714년(숙종 40) 향유(鄕儒)들에 의해 건립되어 1717년 사액받은 송담서원(松潭書院)에 모셔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는 부산 동래의 충렬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항거한 의사(義士)들을 포장(褒獎)한 유림의 성역이다. 현존하지는 않으나 양산을 충절의 고장으로 빛내주는 대표적인 사적 중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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