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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091
한자 烽燧
영어의미역 Beacon Fire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전통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불과 연기로 통신하던 제도와 시설.

[개설]

봉수제(烽燧制)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까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 분명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고려 중기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의 수,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연대(烟臺) 축조, 봉수망(烽燧網) 획정 등 체제를 정비하였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고, 연변 봉수는 해륙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호칭한 것으로 그 임무 수행이 가장 힘들었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로 수적으로 대다수였다. 봉수의 관장은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지방에서는 수령이 직접 관할하였다. 봉수제는 파발제·역참제와 병행되면서 그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에 근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양산의 봉수]

조선시대 양산에는 원적산(圓寂山) 봉수대가 있었다. 동래 계명산(鷄鳴山)과 언양 부로산(夫老山)을 응하던 봉수대였다. 조선 후기에는 위천봉수(渭川烽燧)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산20-21번지 원적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리는 표고 325m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과 서쪽의 주변에 깬돌로 쌓은 석축이 있으며 동쪽은 둥글게 석축을 쌓아 그 안에 기와집과 고사(庫舍)를 지었던 흔적이 있다.

1832년 무렵에 간행된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에 의하면, 위천봉수가 동래 계명산봉수로부터 40리 되는 지점, 언양 부로산봉수로부터 4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기록하였다. 위천봉수에는 별장(別將) 1인, 감고(監考) 1인, 봉군(烽軍) 등 100명이 소속되었고, 한 곳의 연대(烟臺), 다섯 개의 연굴(烟窟)이 설치된 바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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