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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달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263
한자 崔達守
영어음역 Choe Dal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성별
생년 1916년연표보기
몰년 1962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달수(崔達守)는 1916년 아버지 최성운(崔聖運)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김기출(金己出)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으며, 1962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서 타계했다.

[활동사항]

최달수는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2월 20일 양산 사회단체회관에서 열린 양산농민조합 제3회 정기총회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납부 등을 결의하자 일본 경찰이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같은 해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최달수(崔達守)를 비롯한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 명의 조합원들이 조합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총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농민조합 간부 윤복이(尹福伊)와 이만줄이 양산경찰서장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후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이 다시 체포된 조합 간부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최달수 비롯한 170여 명의 조합원이 체포되면서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달수는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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