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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333
한자 金巖
영어음역 Gim A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백승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김해
대표관직 양주태수

[정의]

고대 남북국시대 양주·강주·한주 태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김유신의 현손이고 김윤중의 손자이다.

[활동사항]

김암은 어릴 때부터 총명, 민첩하고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젊어서는 이찬(伊飡)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고 하는데, 틈을 내어 음양가(陰陽家)의 스승을 찾아가서 술법(術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매우 총명했기 때문에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둔갑법을 터득하고는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이라는 책을 지어 스승에게 보여주었다. 스승이 놀라면서 “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는 766~779년에 숙위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으며,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의 태수(太守)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집사시랑(執事侍郞)과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이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보살폈으며, 농사짓는 세 계절의 여가에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그의 술법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전하는 사례가 있으니,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찍이 누리[蝗]가 생겨 서쪽으로부터 패강진 경계로 들어오는데 우글우글 들판을 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김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었다.”

김암은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779년(혜공왕 15)에 왕명을 받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본의 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당(唐)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일본에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김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였으며, 김암은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다.

[학문과 사상]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음양가로부터 술법을 배웠다는 기록에 따라 노장(老莊)에 능통했으리라 짐작된다.

[저술 및 작품]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둔갑입성지법』,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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