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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843
한자 沙松里
영어음역 Sas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사송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구동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6.992㎢
총인구(남, 여) 185명[남 100명, 여 85명]
가구수 92가구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사배마을외송마을을 합쳐 사배의 ‘사’자와 외송의 ‘송’을 합쳐 사송리라고 부른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양산군 동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사배마을은 돌이 많아 석원, 즉 돌더미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배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사배마을의 형성 시기는 신라 초기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씨가 제일 먼저 정착해 지금의 덕담에 집을 짓고 살았으나 고려시대 큰 폭우로 뒤쪽에 금정산의 일부가 무너져 산사태로 마을이 소실되자 아래쪽인 지금의 거주지로 이주해 산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덕담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구 등과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밥그릇 옹기 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후 조선 초기에 지금의 엉골에 구씨 3가구가 정착하여 살았다 한다. 지금은 큰 감나무와 집 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외송리는 오래 전부터 송림이 우거지고 물이 맑아 송정골이라고 하였다. 송림이 우거져 송자가 붙게 되었고 송림의 한 측면 마을에 해당되기 때문에 외송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정산 장군봉을 등에 매고 있으며 9부 능선에는 은동굴이 있는데 신라 초기 때 동광산으로서 신라시대부터 사람이 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마을이 제대로 형성된 시기는 평해황씨가 내송리 안골에서 금정산 중머리 등으로 나와 살기 시작한 약 440년 전이다. 그 당시의 생활 유적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으나 낙농 사업, 형질 변경 등의 사업으로 멸실되어 버렸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동래에서 양산으로 쳐들어 왔을 때 두 차례나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 그 피해가 엄청났다고 한다. 그 후 주민들이 다시 터를 잡은 곳이 현재의 외송마을이다.

[자연환경]

동쪽으로는 녹재산, 남서쪽으로는 계명봉, 장군봉, 북쪽으로는 가모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주위 배면 쪽은 산지로 돌이 많아 돌을 짊어지고 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현황]

사송리동면의 중남부에 있는 지역으로 2009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6.992㎢이며, 2011년 8월 31일 현재 총 92가구, 185명(남 100명, 여 85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사배마을외송마을이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동면초등학교가 있다. 서쪽으로는 금산리, 북쪽으로는 내송리, 동쪽으로는 여락리와 각각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정산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경부고속국도와 지방도 1077호선이 마을을 지나고 있고 부산광역시와도 인접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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