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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현재·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양산의 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048
영어의미역 Past, Currently, the Map of Yangsan Which is the Possibility of Seeing a Future Together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개설]

양산의 지도는 향토의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도구이다. 이는 지도가 종합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양산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그려진 양산의 고지도는 제작 당시의 위치 정보를 이미지로 전달하기 때문에 텍스트로 쓰인 지리서보다 위치 파악에 효율적이다. 따라서 양산의 고지도는 양산 지역의 향토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

양산의 고지도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양산 지역 문화 유적의 위치와 지도가 제작될 당시의 향토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고지명들은 당시의 지리적 속성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며 일제강점기로 인해 단절된 향토 역사 공간을 연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

[고지도에서 현대 지도에 이르기까지]

양산의 지도는 제작 시기에 따라 조선시대 제작된 고지도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중 그려진 조선 지형도 및 해방 이후 제작된 현대 지형도로 분류될 수 있다. 양산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그 위치만 표현되다가 조선 후기에 고을 지도가 제작되면서 상세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가 제작되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대축척 지도들은 이와같은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제작된 지도는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제작 기술은 과학적이었으나 국가 발전의 맥락에서 볼 때 근대 지도로서의 의미는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지도가 제작되었고, 196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우리 기술진에 의해 비로소 주체적으로 근대 지도가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축척의 지도가 측량 및 항공사진 기술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양산의 도시계획도, 관광지도 등 여러 형태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묘사된 양산의 모습]

1. 조선 전기 지도에 묘사된 양산

우리나라의 지도 발달사를 통해 볼 때, 양산 지역의 지도도 오래전부터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나 지도가 종이나 비단 위에 그려졌기 때문에 소실되거나 멸실된 경우가 많았다. 현재 양산 지명이 기재된 가장 오래된 지도는 1402년(태종 2)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392년 조선 개국과 함께 왕권 확립을 위하여 지리서와 지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부분은 이회(李薈)가 그린 「팔도지도(八道地圖)」로 추정되고 있다. 양산 일대를 보면 낙동강의 유로에서 남강, 밀양강, 금호강 등의 지류가 뚜렷하며, 양산 주변의 동래, 연양, 기장, 김해 등 여러 군·현들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후 세종 때 북방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의 통치를 위해 상세하고 정확한 전도 제작이 이루어 졌다.

조선 전도의 제작과 함께 도별도 제작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의 첫머리에는 「팔도총도(八道總圖)」와 해당 도의 앞부분에 도별도가 첨부되어 있다. 판심에 판각된 대로 「동람도(東覽圖)」라 호칭된다. 이는 목판본으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팔도총도」에는 양산과 관련하여 낙동강 우안에 가야진(伽倻津)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중앙 정부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경상도(慶尙道)」 지도에는 양산 주변의 낙동강 유로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양산 부근에 이르러 밀양강을 합류하여 흐르다가 김해와 동래를 거쳐 남해로 유입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마다 진산이 그려져 있으며 양산의 경우 취서산(鷲棲山)[현 영축산]이 진산으로 그려져 있다. 김해는 낙동강 우안에 표시되어 있으며 신어산(神魚山)이 진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동람도」는 이후 조선 후기 도별도 제작에 영향을 미쳐 대부분의 내용이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복간되고 도별도가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지리 정보가 유통되면서 당시 지리 지식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조선 후기 지도에 묘사된 양산

1) 조선 전도와 도별도

임진왜란 이후 중국을 통해 서구식 지도가 소개되어 우리나라 고지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함께 진경산수 회화의 발달은 고을을 그린 군현지도에 영향을 미쳤다. 지도도 목판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내용도 조선 전기의 지도에 비해 상세해졌을 뿐만 아니라 봉화 지도와 같은 특수한 목적으로도 제작되었다.

18세기 중반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조선 전도는 이전의 지도 제작 수준을 능가하는 지도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자세한 대축척 지도이고, 또 축척을 지도의 모든 지점에서 동일하게 하였다. 축척이 약 1:420,000인 도별도와 조선 전도로 구성되어 있다.

도별도 중 「경상도」 지도에 그려진 양산은 이전의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양산으로부터 남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밀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황산(黃山)과 통도사(通度寺) 지명이 기재되는 것 외에 금정산(金井山)에 성곽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을 지도들이 다양하게 그려지게 되면서 지도 제작 기술이 축적되었다. 19세기 들어 조선 전도의 형태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들 중 대표적인 지도가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해좌전도(海左全圖)」와 『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가 있다. 이들 지도에서는 한양으로부터의 여정, 황산, 통도사 뿐만 아니라 당시 양산에 속하였던 대저도(大渚島)의 칠점산(七點山)이 표시되기도 하였다.

2) 양산의 고을 지도와 대축척 지도

18세기 들어 각 고을의 지리적인 내용을 상세히 담은 읍지가 중앙 정부의 지시에 의해 여러 차례 편찬되었다. 특히 『여지도서(輿地圖書)』가 편찬되면서 양산군의 지리지 앞에 양산 군현지도가 수록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고을의 지도를 책으로 엮은 지도책이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지도에 표현된 양산의 지리 정보는 이전의 조선 전도나 도별도의 수준을 훨씬 넘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이들 지도 중 대표적인 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양산 지도는 1734년(영조 10) 회화식으로 그려진 지도이다. 양산의 지리지와 지도를 한 면에 표현하여 지도와 지리지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비변사에서 제작한 1리 방안 위에 그려진 지도는 1734년경부터 각 도별로 제작되었으며 이 지도는 양산 고을에서 각 장소 간의 거리를 파악하고, 봉수의 연결망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들 지도가 완성된 후 약 20년 뒤인 1770년경에는 새로운 형태의 군현지도가 제작되었다. 양산은 20리 방안 위에 그려졌으며 울산, 밀양 등 인근 고을도 동일한 축척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를 이어 붙이면 도별도 및 전국 전도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1834년(순조 34) 『청구도(靑邱圖)』,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 등의 대축척 전도가 제작되었다.

『청구도』는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판으로 나눈 방안 지도로서, 남북 100리, 동서 70리가 지도의 1면으로 제작되었으며 각 도면을 연결시키면 전국 전도가 된다. 양산은 22층과 23층에 걸쳐 그려져 있다. 분첩절첩식으로 제작된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 양산은 18~19층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 축척은 약 1:162,000이다.

한편, 『대동여지도』가 목판으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이전에 필사본으로 제작된 『청구도』와 내용상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고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은 현재 12장이 남아 있으며 이 중 양산의 일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면에 울산 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지도와 임자도가 판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전라도의 광주와 영광 지역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후 11년 뒤인 1872년(고종 9) 전국 각 군·현과 관방을 그린 459매의 대축척 낱장 군현지도가 제작되었다. 이들 지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작되었고 이전 읍지에 첨부된 지도를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으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양산의 역사·지리 정보량이 다른 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하다.

[개항 이후~일제강점기 지도와 양산]

개항 이후 조선은 측량 기술을 바탕으로 근대 지도의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열악한 재정 상태로 인하여 19세기 말까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909년 탁지부(度支部)를 토지조사국으로 개칭하여 본격적인 지도 제작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면서 근대적인 지도의 제작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이전에 근대적인 지도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사용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을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1:50,000의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는 국내에서 영인되어 보급된 바 있으나 양산 도엽은 누락되어 있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은 1910년에서 1915년에 이르는 기간에 측량을 완료하였고 1918년까지 지도 제작을 완료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산의 1:50,000 지형도가 제작되었다.

[해방 이후~현대 지도와 양산]

해방 이후 일제가 제작한 5만분의 1 지도 원판 722매는 미군정청에서, 조선총독부에서 사용하던 삼각점 및 수준점 성과표는 대한민국 육군공병감실에서 인수함에 따라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초석을 이루었다. 1962년 5월 건설부 국립건설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지도 제작 사업이 이관되었다.

이후 지도 제작에 필수적인 측량 기준점의 정비 사업은 계속되었으며 1962년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 사업인 울산공업단지 조성 계획의 기초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지형 측량을 실시하였고, 1967년부터 항공사진 측량 방법에 의한 최신 지도인 1:25,000 지형도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4년까지 762도엽(규격 7.5'×7.5')을 우리 손으로 제작·완료하였다.

1973~1974년에 걸쳐서는 1:25,000 지형도를 축소하여 1:50,000 지형도 239도엽을, 이밖에 1:250,000 지세도 13도엽을 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산 지역의 근대 지형도가 우리 손에 의해 제작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1972년부터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 2003년 7월 국토지리정보원에 의해 지도 제작이 본격화되었으며 국가지리정보시스템 구축의 일환으로 양산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와 함께 수치 지도도 발행·보급되고 있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양산 관련 지도에는 1:250,000, 1:50,000, 1:25,000, 1:5,000 지형도가 제작되어 보급되고 있다. 이들 지형도는 양산시의 도시계획도 및 관광지도 등을 제작하는 데 바탕이 되고 있다.

[주요 고지도에 나타난 양산의 모습]

양산이 묘사된 조선시대 고지도는 군현지도첩과 대축척 전국전도로 구분되는데, 이들 지도는 각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군현지도는 회화식 군현지도, 1리 방안지도, 20리 방안지도, 지방군현지도로 나누어진다.

1. 군현지도

1) 회화식 군현지도

(1) 『해동지도(海東地圖)』 양산(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47.0×30.5㎝, 규장각)

1750년대 초 제작된 『해동지도』에 수록된 양산의 지도이다. 370점의 지도를 8첩에 수록한 관찬 회화식 군현지도집으로 세로 47.5㎝, 가로 30㎝의 지도책에 일정한 규격의 지도들이 그려져 있다. 양산의 묘사 확인을 보면 전체적으로 황산강(黃山江)을 끼고 있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산줄기가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표현하였다.

동북쪽과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맥의 모양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산봉우리들은 비교적 완만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요 산지로서 취서산(鷲捿山)[현 영축산], 원적산(圓寂山), 증산(曾山) 등이 표현되어 있고, 성황산(城隍山)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고을 외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황산강으로 유입된다. 황산강의 주요 하중도로서 소요도(所要島), 덕두도(德頭島), 대저도(大渚島)가 표현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굵은 실선으로 산 및 하천의 위치와 중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읍치(邑治)로부터 사방으로 출발하는 세로(細路)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2) 『여지도(輿地圖)』 양산(1736~1776년, 채색필사본, 30.3×28.5㎝,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군현지도책인 『여지도』에 수록된 지도이다. 이면에 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에도 동일한 이름과 구성이 유사한 지도첩이 소장되어 있으나 그림이 보다 단아하며, 필체도 뛰어나다. 오방색 등의 채색을 조화하여 산천, 성곽, 도로 등을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표현하였다.

양산의 모습을 보면 동쪽의 일부 산지를 제외하고는 북으로 향하는 일방시점에 의해 그려져 있다. 산지는 고을 북쪽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많은 산들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산지명은 밀양과의 경계에 놓인 이천산(梨川山)과 기장과의 경계에 있는 원적산, 그리고 대저도의 칠점산과 황산강에 연한 증산 만이 표기되어 있다.

북서쪽에서부터 남으로 통도봉산(通度封山), 석장봉산(石藏封山), 내포봉산(內浦封山)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동북쪽에 대둔봉산(大屯封山)이 있다. 고을은 상북면(上北面)을 비롯한 9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치는 지도의 중심에서 오른쪽에 그려져 있으며 원형의 성곽으로 표현된 읍성은 지도의 전체 크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읍성은 북문과 서문을 비롯한 세 곳의 문과 문루를 가지고 있으며 성안에는 많은 관아들이 표현되어 있다. 관아 건물은 남향과 서향으로 그려져 있다. 주 관청인 아사 및 객사를 비롯하여 창포정(菖浦亭), 쌍벽루(雙碧樓)와 같은 누정이 표현되어 있다.

(3) 『여지도(輿地圖)』 양산(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26.5×19.1㎝, 규장각)

숙종영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의 군현별 지도이다. 지도의 구도는 『해동지도』 및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여지도』와 거의 유사하여 모사관계에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읍치 서쪽에 그려진 송단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세워져, 1717년(숙종 43)에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이다.

통도사의 바로 왼편에는 경계표와 풍수사상에 의해 방액(防厄) 구실을 한 화강암으로 된 통도사 국장생석표가 그려져 있다. 서쪽 황산강 절벽 위에 그려진 임경대(臨鏡臺)는 신라시대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놀고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4) 『지승(地乘)』 양산(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27.0×19.0㎝, 규장각)

『지승』은 전국 각도 군·현에 대한 지도와 이면에 각 지방의 형세를 수록한 지리서이다. 총 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산은 그 중 제3책에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표현 방식이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동일하다. 축척이 거의 유사한 것에 비해 지명의 글씨체가 상대적으로 매우 큰 편이다. 지명의 표기 위치도 차이가 난다. 산맥을 『여지도』보다는 덜 모식적으로 나타냈다.

산줄기로 산맥을 표현하였고 일부 구간에는 봉우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산봉우리는 매우 완만하게 표현되어 있다. 읍성의 전체적인 표현은 유사하나 성곽의 석축을 하나씩 분리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읍성 내의 건물 중 옥(獄)이 추가로 표현되어 있다. 고을 북쪽에 있는 통도사 국장생석표의 표현이 다르며 근처의 통도봉산(通度封山)도 생략되어 있다.

2) 1리 방안식 군현지도

(1) 『영남지도(嶺南地圖)』 양산군 지도(19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106.0×83.0㎝, 규장각)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양산군 지도이다. 표지에 비변사인이 찍혀 있어 다른 지도와 구별하기 위해 『비변사인영남지도(備邊司印嶺南地圖)』라고 부른다. 총 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5년(영조 21)에서 1760년(영조 36) 사이에 만들어진 지도책으로 추정된다. 양산 지도는 제2첩에 포함되어 있다.

대저도에 위치한 칠점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소하천·중하천·대하천으로 구분하여 그렸다. 각 면(面)과 역(驛)은 사각형 안에 표기하여 행정지명과 기타 인문환경과 관련한 지명들을 구분하였다. 읍치로 통하는 모든 도로망이 직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대로·중로·소로를 채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다. 읍치로 뻗어 나온 도로는 동쪽으로는 황산역(黃山驛)을 통하여 김해 및 밀양 지역으로 통한다.

(2) 『영남지도(嶺南地圖)』 양산군(채색필사본, 18세기 중엽, 32.5×23.0㎝, 영남대학교 박물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영남지도』에 수록된 지도이다. 지도의 표현 양식과 내용 등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영남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규장각본이 1리 방안에 그린 대형 지도이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불편이 따르는데,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크기가 작은 책자의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양산의 묘사 형태를 보면 영축산 등 일부 산들을 제외하고는 삼방의 정방향으로 그려진 지도이다. 지명도 방향과 일치시켜 표기하였다. 산지명은 대부분 표기되어 있는 반면, 하천지명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읍치’라고 표기된 고을의 중심에는 읍성의 표현은 없다.

고을의 동쪽과 서쪽 산지에서 흘러내린 하천은 읍치 앞에서 물을 합치어 수구를 이루어 바다로 빠져 나간다. 지도의 오른쪽에 봉수의 연결이 직선으로 표현되어 위천봉대(渭川烽臺)를 통과한다. 방안의 격자를 반영하여 그린 도로는 계단식의 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중심으로부터 난 도로는 사방으로 연결되어 이웃 고을과의 통로 구실을 한다. 경상도 역승(驛丞) 중 하나인 황산도의 찰방역인 황산역이 있음으로써 양산군은 이 일대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였다. 물금진을 연해 나 있는 도로는 폭이 매우 좁은 도로[勿禁味棧路]로 표기되어 있다.

(3) 『광여도(廣輿圖)』 양산군(19세기 초, 채색필사본, 37×28.3㎝, 규장각)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군현지도책인 『광여도』에 수록된 양산 지도이다. 『광여도』는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그린 것으로 총 7책으로 되어 있다. 양산은 제4책(경상좌도)에 수록되어 있다. 면(面)과 역(驛)은 행정지명처럼 사각형 안에 표기하여 다른 지명의 표기 방법과 구분하였다.

산지는 마치 통일된 범례를 사용하여 그린 듯하다. 다양한 시점이 다양한 산봉우리 방향으로 표현되어 있고, 원적산, 영축산, 대둔산, 금정산, 칠점산 등 주요 산의 지명을 표기하였다. 하천은 주요 산지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형상으로 묘사하였다. 양산군 내를 흐르는 소규모 하천들은 굵은 실선 하나로 표현하였으며 낙동강은 지도 하단에 매우 넓게 나타냈다. 그러나 하천지명은 표기하지 않았다. 낙동강은 대저도, 덕두도, 유도(柳島), 용동궁도(龍洞宮島) 등을 지나 남해로 유입된다.

(4) 『각읍지도(各邑地圖)』 양산(채색필사본, 19세기 초, 29.2×19.2㎝,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각읍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군현 지도이다. 이 지도책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군·현을 그린 총 119매의 지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작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지도의 구성은 일부 군·현의 경우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인 『영남지도』와 거의 일치하나 국립중앙도서관의 『여지도』와 유사하여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의 차이를 보면, 양산 읍성은 성곽의 표현 없이 둥근 겹원으로 나타냈으며 읍성 내의 건물도 건물의 본채를 그리지 않고 기둥으로만 표현하였다. 칠점산을 각각 7개의 산봉우리로 나타내지 않고 산맥으로 연결하였다. 통도사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가 호리병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둔사(大屯寺)는 한 채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다.

3) 20리 방안식 군현지도

(1) 『조선지도(朝鮮地圖)』 양산군(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49.8×38.5㎝, 규장각)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지도』에 수록된 군현지도이다. 4.2㎝의 크기인 20리 방안 위에 그려진 지도이다. 양산 지도는 홍색, 녹색, 청색의 정색 삼색만을 사용하여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군의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맥은 양산을 울산 및 기장과 지형적으로 구분짓고 있다.

서쪽의 천대산(天臺山) 역시 밀양부와 양산군을 갈라놓고 있다. 자연 지형으로 경계가 지어지지 않은 곳은 검은 실선으로 명확하게 군의 경계를 표시해 두었다. 고을의 서쪽을 흐르는 삼차강(三叉江)은 그 하류에 대저도와 덕도(德島)와 같은 하중도(河中島)를 그렸다. 삼차강 너머 서쪽 지역은 김해 지역이다. 덕도에 ‘ 김해(金海) ’라는 지명을 표기함으로써 행정구역상 김해에 속한 지역임을 나타냈다.

(2) 『팔도지도(八道地圖)』 양산군(1838년, 채색필사본, 35.7×21.2㎝,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팔도지도』에 소장된 양산 지도이다. 20리 방안식 지도로 내용은 규장각 소장의 『조선지도』와 동일하다. 수록된 지명들을 볼 때 1838년(헌종 4)경에 모사된 지도로 보인다. 거의 동일한 내용의 지도책이 2점 이상 있었다는 사실은 지도책이 민간으로도 유출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지명의 글씨체와 지도상의 지명 표기 위치에서 『조선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산맥의 표현이 덜 정교하며 봉대의 표현도 다르다.

(3)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 양산군(1776~1795년, 채색필사본, 34.1×21.2㎝,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군현지도책인 『해동여지도』에 수록된 양산 지도이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군현도는 1권과 2권에 수록되어 있다. 20리 방안위에 그려진 것은 다른 방안식 군현지도와 동일하나, 일부 군·현에서는 2~8곳의 군현 지도를 연결하여 그려져 있다. 제작 연대는 1800~1804년으로 추정된다. 다른 20리 방안지도와 달리 방안이 지도상에 노출되어 고을 내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점선으로 표현된 군·현 경계 표시와 함께 인접 군·현을 연계하여 표현함으로써 양산의 지리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산맥의 표현은 비슷하나 강줄기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읍치는 원 속에 고을의 명칭인 양산군을 ‘양(梁)’이라고 나타냈다. 도로의 표현은 없으며 『조선지도』(규장각)에 표현되어 있는 금정산 봉대가 생략되어 있다.

4) 지방 군현지도

(1) 「1872 군현지도(1872 郡縣地圖)」 양산(1872년, 채색필사본, 121.9×72.5㎝, 규장각)

1872년(고종 9)에 전국적으로 지방에서 편찬된 낱장 지도 중의 하나이다.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다. 산과 하천, 고개, 왕릉, 사찰, 면, 역참, 장시 등 지역의 모습이 다른 어느 지도보다도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양산의 경우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개화식으로 표현되었다. 방위는 표현하지 않았으나 북쪽이 지도의 위쪽에 배치되게 하였다.

사방의 경계 지역을 거리와 더불어 표기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읍치까지의 거리도 960리임을 주기하였다. 읍성 주변으로 황색으로 채색한 집을 겹쳐 놓음으로써 마을을 표시하였다. 방리(方里) 단위까지 촌락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곡(稅穀)의 용이한 수집을 위한 당시의 사창제(社倉制)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도와 달리 방면(方面)의 행정지명은 표시하지 않았다.

(2) 『여지도서(輿地圖書)』 양산(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영인본), 20.5×31.0㎝, 한국교회사연구소)

『여지도서』의 부도로 첨부된 군현지도로 지방 화원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편찬된 읍지 및 지방에서 제작된 지도에 영향을 미친 지도이다. 양산의 경우 서쪽 방향을 제외한 모든 산맥이 표현되어 있으며 매우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칠점산(七点山)과 증산을 제외한 나머지 산지명은 표기하지 않았다.

고을의 주요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황산강(黃山江)으로 유입되는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류 및 지류의 구분은 명확하나 강폭을 두 개의 마주보는 실선으로 매우 넓게 표현하고 있어 실제 하천의 크기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동북쪽에 위치한 순지(蓴池)는 다른 연못들과는 달리 매우 크고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양산군에서 이 연못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3)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양산(1832년, 채색필사본, 22.6×35.0㎝, 규장각)

1832년(순조 32) 편찬된 『경상도읍지』 중 양산읍 지 부도로 제작된 채색지도이다. 양산의 지도는 표현 방식 및 지명 표기가 『여지도서』(한국교회사연구소)와 동일하다. 지도 제작에 있어 모사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단지 지도를 통하여 모사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4) 『영남읍지(嶺南邑誌)』 양산(1871년, 채색필사본, 20.8×31.2㎝, 규장각)

1871년(고종 8) 편찬된 『영남읍지』에 삽입된 채색지도이다. 내용은 1832년(순조 32)의 『경상도읍지』와 동일한 확인을 담고 있다. 양산은 개화식 구도로 그려져 있어 좌·우측의 원적산과 영축산 줄기가 고을을 감싸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읍기(邑基)를 중심으로 사방위를 나타냈다. 읍기를 지도의 중심부에 두지 않고 상단의 중앙부에 두어 주변 지역, 특히 남쪽 외곽 지역의 왜곡된 묘사를 줄이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 산지의 표현은 남쪽 해안을 제외한 모든 산들이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산맥을 이루는 형태로 그렸다. 표현은 매우 조잡하며 사실적이지 못하다. 주산의 경우 정확한 지명은 표기되지 않은 채 읍기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다.

(5) 『영남읍지(嶺南邑誌)』 양산(1894년, 채색필사본, 20.8×31.2㎝, 규장각)

1894년(고종 31) 편찬된 『영남읍지』 중 양산읍지의 부도로 제작된 채색지도이다. 『영남읍지』(규장각)와 같이 개화식으로 그려진 회화 형태의 지도로서 산세는 북쪽에서 각기 동쪽과 서쪽으로 뻗어 나온 양대 큰 산맥이 양산군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그렸다. 깊은 산골짜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고을의 산세가 험준함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 원적산영축산의 지명을 표기하였다. 하천은 굵은 실선으로 나타냈다.

2. 대축척 조선지도

(1) 『동여비고(東輿備攷)』 양산(1682년경, 채색필사본, 47.0×35.0㎝, 양산 대성암)

양산 대성암에 소장된 『동여비고』에 수록된 양산 일대의 지도이다. 양산 고을의 남쪽과 서쪽은 각각 낙동강 및 그 지류에 해당하는 의천(疑川)과 가야천(伽倻川)에 의해 김해 및 밀양과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으나 산줄기에 의해 구분되는 북동쪽의 경계는 불명확하다.

다른 산들에 비해 영축산원적산의 규모를 크게 그려 중요성을 부각하였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산의 크기를 적게 표현하고 봉우리를 매우 원만하게 나타냈다. 하천은 본류인 낙동강과 지류인 황산강, 위천, 북천 등이 그려져 있다. 구읍포교(仇邑浦橋)와 계원교(雞原橋)가 이러한 소하천들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다.

(2) 『청구요람(靑邱要覽, 靑邱圖)』(김정호, 1834년, 채색필사본, 2책, 31.5×21.5㎝, 규장각)

대축척 전국전도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지명들은 생략하고 주로 산과 하천 등 자연 지세를 중심으로 표현하였다. 양산의 경우 고을 서쪽의 삼차강은 낙동강의 하류에 해당하는 물길로서 김해와 양산군을 갈라놓고 있다.

산지명은 표기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산지는 고을의 동북쪽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 산지에서 흘러내린 하천들이 삼차강으로 유입된다. 가는 실선으로 표현된 강은 도로와 구분하기 힘들다. 이천산(利川山), 사배현봉대(沙背峴烽臺), 그리고 위천봉대 만이 ‘∧’모양을 반복하여 그린 단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3) 『대동도(大東圖)』(『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양산 일대(김정호, 1861년, 가채목판본, 670.0×380.0㎝(22첩), 부산대학교 도서관)

양산군의 전체적인 형태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는 짧으며 북쪽의 면적이 넓고 남으로 갈수록 협소하여 마치 도깨비방망이 형상을 하고 있다. 산지는 굵은 실선으로 표시하여 산맥을 나타냈고 영축산, 원적산, 위천산, 증산 등 주요 산들은 봉우리를 강조하여 달리 산을 표현하였다.

진산인 성황산에 과거에 고성이 있었음을 범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상으로 나열되어 명명된 남쪽 해안의 칠점산에 표현된 일곱 개의 산 모양이 매우 이채롭다. 동북쪽 및 서북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북천과 위천은 황산강 및 삼차하(三叉河)로 유입한다. 또한 이 강들은 소요저도(所要渚島) 및 사두도(蛇頭島) 등 하중도를 만들고 남해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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