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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농사의 터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3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용당들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향토사연구회

용당들은 이곳 마을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다. 1,322,320㎡에 달하는 넓은 용당들에는 여러 가지 농산물이 자라나고 있다. 보통 농산물이라고 하면 벼나 보리를 연상하지만 용당들에서는 그러한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이곳이 여름이면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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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들 가는길

마을의 속담 가운데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에 얽힌 사연이다. 이 속담은 이곳이 그만큼 벼농사를 하기가 어렵거나 잘 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용당들에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 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박농사, 딸기농사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계절농사를 고집하는 것도 이곳이 물난리가 많이 나는 지형적 특징을 고려한 것이었다.

“수박 수확을 일찍 하는 집도 있고 늦게 하는 집도 있는데 여름 출하에 맞추려면 보통 7, 8월에는 끝이 난다 아이가. 그런데 이때 비가 오면 완전히 한 해 농사는 망치는 것이이서 절단이 나 버린다. 작년 여름에 물난리가 났다 아이가. 마을에 물이 한 번 차면 사람 키만큼 차니까 농사고 뭐고 사람 사는 것도 어렵게 된다 아이가.”(윤춘식, 중리마을 이장, 58세)

그러나 다른 어른의 말에 의하면 여기도 옛날에는 잡곡, 오곡 안 되는 곡식이 없었다. 그래서 벼, 보리, 소맥, 장맥, 대두, 소두 등 별별 잡곡을 다 재배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러한 잡곡이 수입이 거의 안 되니 논을 묵혀놓고 잘 안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무시나 배추 같은 거해서 가을되면 김장 한다고 큰 돈 좀 벌었제. 딸기농사를 하기 전에는 무시나 배추 심어면 상인들이 밭째로 사가지고 가고 우리는 그냥 밭째로 넘겨버리면 신경 쓸 일이 없었는데, 요새는 무, 배추를 심어도 가을이 되도 잘 안 팔리니까 다 버려야 되는 일도 있고 해서 심지를 않는 아이가. 요새는 주로 딸기나 수박, 당근을 많이 하고 있다 아이가.”(하용필, 중리마을 농민,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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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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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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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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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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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당근

이렇게 곡물농사에서 딸기, 수박농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종목의 농산물을 심고 가꾸어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터전을 여전히 가꾸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계절농사를 중심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1년 내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게 마련이다.

하자용 어른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사시사철 일이다. 딸기 끝나면 딸기 심어 놓았던 곳에 수박을 심어야 되고 또 나중에 딸기 철이 될 때 대비해서 따로 딸기 모종도 심어 놓고 해야 된다 아이가. 그렇게 여름 땡볕에 내도록 밭을 매야 돼서 별로 쉴 틈이 없어.”고 한다.

마을 어른들이 전부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여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하자용, 중리마을 농민,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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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를 심어 놓았던 곳에 수박을 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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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수박

이렇게 사시사철 농사를 지으니 몸은 많이 지치지만 자신이 가꾸고 있는 넓은 농토가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일 것이다. 목에는 땀을 닦을 수건을 두르고 그들은 그 큰 용당들을 하나하나 푸르게 채워가고 있다. 그들이 한해에 해 나가고 있는 일의 양은 용당들의 크기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철도변 쪽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전부 큰 평수로 짓는다. 작게는 천 평이 넘고, 많게는 저 중리 쪽에 근 만 평 짓는 사람도 한 사람 있다 아이가. 보통 농사는 자기 식구끼리 하는 것인데 만 평 짓는 사람은 식구들끼리 해도 일손이 모자라니까 일꾼을 많이 쓰고 있다 아이가. 이렇게 농사짓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통 큰 기업 하나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들을 한다 아이가. 거기에는 못 미치지만 이천 평이 넘게 짓는 사람도 제법 있어. 평균적으로 보면 천 오백 평 이상은 얼추 다 되는 것 같어. 이 정도 농사를 크게 짓는 사람들은 전부 토박이들이지 외지인들은 아녀. 딸기 따고 하면 박스 넣어가지고 대부분 부산, 울산으로 전부 다 나가버린다 아이가.”(김갑식, 당곡마을 농민, 65세)

많은 양의 농사를 짓다보니 반갑게 인사하고 몇 마디만 나눠도 그냥 한 소쿠리씩 딸기를 나눠주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마음 좋은 사람들이 힘들게 지은 만큼 다 잘 팔려서 기분 좋은 벌이가 되면 좋겠지만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하는 것은 아니니 아쉬울 따름이다.

“여기 농사짓는 사람들 가운데 돈 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를 않어. 이 중에 한 20%는 돈을 벌고 그 아래 한 30%는 겨우 본전을 찾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보통 빚을 2000~3000만 원 정도 다 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더 나쁜 경우는 심지어 야반도주나 파산을 하는 사람도 있거든. 마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다 딸기농사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장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어. 그래도 수지타산이 맞으려면 한 3000평 정도는 해야 하는 기라. 그렇게 해야 일 년에 한 1억 2천 정도 번다 아이가. 그것도 다 내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 아이고 투자금액으로 3000만 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이것저것 빼고 나면 실제 한 8000만 원 정도가 남거든. 이것도 생활비로 하다보면 별 소득이 없다 아이가.”(이지곤, 중리마을 농민, 59세)

농작물은 그들에게 돈벌이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거쳐 지어오신 농사를 통해 그들에게 농작물은 마치 자식과 같다.

중리마을 이장은 음악으로 재배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어떤 하우스에는 스피커를 달아두고 딸기나 수박에게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거든.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병충해도 없고 해서 아마 더 잘 자라지 않을까 해서 하는 것이야. 음악소리는 채소나 농작물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음악도 듣고 하니까 기분은 좋아. 그리고 덕분에 일하는 사람도 심심하지 않다. 또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작물에 비닐을 덮어두는데 그것은 여름에는 잡초가 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겨울에는 보온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이거든. 물론 나중에 다 자라면 비닐을 걷어내면 되거든.”(윤춘식, 중리마을 이장, 58세)

그들도 처음부터 전문가는 아니었다. 지금은 검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도 처음엔 그렇지 않았을 테니 그들의 얼굴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저 농작물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다가 점점 농사지으면서 알게 되는 것들을 아주 자세히 적어놓기도 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고 중리마을 농민 이지곤은 말한다. 그도 군 입대 전 노지 재배의 경험이 전부였으나 아주 작은 시설로 시작하여 오늘날의 전문 농사꾼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는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불 대신에 짚을 짜서 보온을 하였고, 아직 이곳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경운기로 펌프질을 하였다고 회상하였다.(이지곤, 중리마을 농민, 59세)

용당들의 모습도 세월이 지나온 만큼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마을을 꾸리고 용당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과 마음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인사만 해도 웃으며 먹어보라고 한아름 딸기를 건네주는 그들의 마음이 영원히 용당들을 푸르게 빛내주기를 바래본다.

[정보제공]

  • •  윤춘식(중리마을 이장, 58세)
  • •  하용필(중리마을 농민, 76세)
  • •  하자용(중리마을 농민, 73세)
  • •  김갑식(당곡마을 농민, 65세)
  • •  이지곤(중리마을 농민,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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