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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의 산길 : 단조성 가는 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102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 단조성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향토사연구회

지산마을을 따라 신령스런 독수리의 산이라고 하는 영축산을 오르는 길에는, 지금은 애잔한 흔적만 남아 있는 단조성이 있다. 그 흔적을 찾아 단조성으로 가는 길은 먼저 통도사 입구에서 지산리(서리·평산·지산)의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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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성

그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정도 가면 조선 숙종 37년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그 곳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약 3㎞를 오르면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꼬치배기 등에 오르게 된다. 이 등에서부터 정상까지는 꼬불꼬불한 급 경사길이다.

이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 이 길은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가쁜 숨을 쉬며 오를 수밖에 없는 길로서, 땀을 흘리지 않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약 4㎞를 오르면 9부 능선에, 정상의 암벽과 이어진 큰 절벽바위가 가로막고 있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동굴이 보인다. 이 굴을 ‘여천각시굴’이라 한다. 이 바위 담을 돌아서 오르면 바로 영축산 정상이다.

영축산 정상에 올랐다면 동쪽과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동으로는 동해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고, 남해에는 부산 앞바다가 가물가물 아른거린다. 그리고 이제 북서쪽으로도 한번 돌아보자.

영축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보면 약 4㎞ 달하는 장방형 단조성이 눈앞에 보이며 멀리로는 신불산(1051m)이 우뚝 솟아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때 단조성에 얽힌 이야기가 생겨난 곳이다. 단조성의 둘레는 약 12㎞로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자연암반의 절벽을 이용하였고 암반 사이의 낮은 면은 석축으로 메우고 그 밑은 깎아 내어 급경사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단조봉에 올라 이 성을 보고 ‘이 성은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이 능히 열지 못할 곳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하니, 그 때의 기상이 얼마나 드높았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단조성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제갈량의 전법으로도 도저히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벽’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단조성은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와 연결되며 성의 형상은 서북으로는 평평한 구릉지이기 때문에 동남부의 성벽과 완전히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석축더미로 이어져 미완성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단조성 자체보다도 통도사의 여덟 가지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단조성의 지는 해(단성낙조(丹城落照))로 더 유명해졌고 마을을 통하는 등산길도 단성낙조와 더불어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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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성의 지는 해

이 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혹은 불심을 위해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오르고 있다. 나는 오늘 이곳이 임진왜란 시기에 많은 조선 백성의 목숨을 빼앗았던 곳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애잔한 마음으로 산을 올라본다.

단조성 여천각시굴에 얽힌 전설 이야기

단조성신불산 정상에서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자리를 잡고 오랜 시간 우리를 내려다보며 함께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했던 당당한 기상의 산성으로 또 한편으로는 우리 조상들의 많은 목숨을 빼앗아 갔던 전쟁터로, 그리고 지금은 멋진 경치를 보여주는 관광명소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우리와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다.

단조성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많이 전해진다. 양산과 언양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줄거리는 비슷한데 내용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거주하는 최학용 씨의 이야기를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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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산 정상에서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예부터 단조성은 요새로서의 위치가 탁월하여 그 어떠한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요새 중의 요새로 손꼽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도 이 요새를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탐을 내었던 곳이었다. 결국은 이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몇 천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였지만 성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군사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다. 단조성의 앞쪽은 높은 절벽으로서 왜병이 도저히 공격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던 일본군은 성벽 아래 ‘여천각씨굴’에서 베를 짜고 있던 노파에게 아군이라 속이고, 성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그리하니 노파는 앞으로는 못가고 이 산 뒤를 돌아서 서쪽의 백발등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왜병들은 울주군 삼남면 삼성전관 부근 들래벌 들판에 허수아비 군인을 수없이 세워 여전히 동쪽을 막는 척 위장하여 두고 그날 밤, 산을 돌아서 서쪽의 백발등으로 공격을 하였고 동쪽을 지키고 있었던 성안 조선군들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으로 쳐들어온 일본군은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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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관 부근 들래 벌 들판

그 안에는 성안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웠던 의병과 피난 온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무참히 죽어간 그들이 흘린 피는 모이고 모여 못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 못은 핏빛으로 물들인 듯 보인다하여 ‘피 못’이라 불러져오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한 의병장은 단조성 벼랑 위에서 한맺힌 노래를 읊었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등이 원수로다!”로 이어지는 백발가를 부르면서 시살등(화살등)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하북면 일대 사람들은 가재도구와 짐을 싸 메고 가족을 데리고 주변 산골짜기로 피난을 갔었는데 한듬골, 보삼골, 삼덕골 등으로 피난하여 지금도 그 마을이 있다. 그런데 그 곳 어디에도 단조성의 피난민만은 단 한 사람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단조성에서의 붉은 노을은 더욱더 붉게 빛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단조성에 얽힌 서산대사 전설이야기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바다를 건너 부산진성에 쳐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된다. 4월 15일에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군은 바로 동래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래성이 함락되면 양산은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양산에서 시작되는 영남대로를 통해 수도 한양이 왜군의 손아귀에 쉽게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다. 양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양산의 한 지명인 물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물금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말하는 의미의 지명이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이에 양산군수 조영규는 양산을 지키고자 이곳에 있었던 관군을 끌고 동래부 전투에 합류하였지만 왜군의 조총에 전사하였다. 특히 영축산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단조성은 양산의 마지막 교두보였다. 양산을 지키고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 그 유명한 서산대사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법명은 휴정이다. 제자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승군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승병을 모집하였다. 서산대사의 격문에 감동을 한 양산 인근의 승려들이 개미떼처럼 단조성으로 결집했다.

승려와 전투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삼국시대 이래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승려들은 자기의 사찰을 지키기 위하여 모두 무술을 익히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승려들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수단으로서 무술을 계속 익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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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처님 세계로 가기 위하여 닦았던 무술이 이제는 나라를 위하여 쓰이게 된 것이다. 단조성전투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이 싸움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승병과 의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적으로 서산대사의 격문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서라, 일어나라, 나오라. 때는 왔다 나라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 죽음으로서 나라를 건져야 한다. 이때를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 살기만 도모하면 죽음이 있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길이 터지는 법이다. 나의 사랑하는 승도여 일어나라 불도여 나오라 나는 나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승병의 총 책임을 내가 맡았다 늙고 병들어 몸을 쓸 수없는 자는 있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기도하여 부처님의 가피와 신명의 도움이 있도록 힘서 정진하고 창 한 자루와 칼 한 자루라도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자는 모두 일어나서 군문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바란다. (중간 생략) 혈혈단신에 걸릴 것이 없는 팔자이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더구나 불보살의 가호가 있음에랴 의분 있는 승도여 모두 일어나서 싸움터로 나가라 싸움이 있어야 승리가 있고 죽음이 있어야 삶음이 있는 것이다. 뜻있는 자여! 일어나라! 나오라! 한데 뭉쳐서 단결하고 진중으로 나아가자.”(『선조수정실록』 25년 7월1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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