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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속의 스님들, 수안스님과 영암스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20106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축서암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종봉

▶ 축서암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가면 1711년(숙종 37)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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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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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서암

우리나라의 절(암자)들은 주로 마을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자연과 일정한 조화를 가지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축서암은 통도사에 소속된 암자이지만, 영축산 아래 지산마을 속에 있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축서암으로 올라가니 다른 절과 달리 나무가 많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나무와 작은 꽃들이 축서암을 에워싸고 있어 그 조화가 상당히 이채로웠다. 축서암의 조경에는 축서암의 수안스님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스님은 이 지역에 자생하는 연꽃을 옮겨와서 기르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만 꽃이 피어 있는 수연은 일반 연꽃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축서암의 주지는 승려 수안(殊眼)으로, 1980년 무렵부터 이 암자의 주지로 있으면서 수행을 열심히 하는 선승이자 선화(禪畵)의 대가이다.

스님은 도장 조각의 대가인 승려 석정의 제자로 시·서·화에 능통하다. 보통 승려들이 선을 행하지 않고 그림이나 시를 짓는 것에 대해 속세에서는 말이 많다. 그러나 승려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 나름대로의 선을 행하는 방식이다.

승려 수안도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그림은 한국적인 풍속을 위주로 하여, 예전의 농촌의 모습인 원두막을 그려놓고 있다. 실제 그림에 나타난 글의 내용은 ‘막걸리 한 사발 열무김치 풋고추를 유별나게 오늘은 그대와 함께 먹고 싶다.’고 하거나 ‘가을의 정취를 그리면서 초가와 홍시 -참 좋은 인연입니다-’고 하여 아주 한국적이다. 이러한 그림은 한국에서보다도 외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 그림으로 잘 알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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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스님 그림

스님은 그림을 통한 사회봉사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기는 손수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대중에게 구입하게 하고 그를 통해 사회봉사를 한다고 했다. 특히 스님의 그림은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대중의 선호도가 아주 높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더욱 하루하루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 승려 영암

평산마을 광장에 들어서서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아주 조그마하지만 사람의 눈길을 끄는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은 다른 집과 달리 담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겉모습부터 뭔가 모를 기운이 느껴지는 이 집이 바로 승려 영암이 거주하는 암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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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스님 거주 암자 그림

승려 영암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암자가 아닌 마을 속에서 일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암자를 지은 것은 통도사의 승려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승려들은 절에 들어가면 절의 규율에 따라서 생활해야 하므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여가는 없기 때문에 이곳에 잠깐 들러서 마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가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암자는 승려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마을에서 자전거도 타고, 라면도 끓여 먹고, 소소하게 푸념을 하고 가는 토굴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세월을 살아가다가 문득 예전에 자신이 성장했던 옛 집을 다시 찾아와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때 그 집의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 모습에 감격하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려 영암이 거처하는 암자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붕만 변형되었지 그대로라고 한다. 통도사의 승려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가 담겨서 그런지 스님의 암자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승려 영암은 화승으로 그림그리기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승려이다. 주로 단청, 탱화, 선화를 그린다. 암자 담장에 그려진 그림은 팔상도로 영암이 직접 그렸다. 팔상도는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으로 승려 영암이 직접 이 팔상도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오면서 집 벽에 그림 봤제? 그 그림이 여덟 가지 길상도다. 길상도를 볼 때 중요하게 볼 게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여러 인연 가운데 복이 있는 연을 많이 맺으라고 그린 그림인기라. 사람은 태어나서 연을 짓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기다. 전생에 복을 많이 베풀면 이승에서는 복을 많이 받을 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악연을 많이 얻을 거니까, 태어났다는 거 자체가 고(苦) 아니겠나?”

영암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인간의 인생살이의 허무함을 설명했다. 어쩌면 찰나에 불과한 인생이지만 그 짧은 인생에서 만난 인연은 가히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승려 영암은 숨을 들여마시고 멈춘 상태에서 순식간에 선화를 그린다. 그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마음이다. 승려 영암이 암자를 지어서 스님들의 휴식처로 제공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표현이며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승려 영암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 속에서도 찰나의 인연과 그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의 다스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었다.

승려 영암이 이 암자에 거처한 지는 12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통도사의 승려들을 위해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지 벌써 12년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영암은 직접 농사를 해서 그 수확물의 일부는 농협에 수매를 하여 일부는 본인의 먹을거리에 충당하고 있다. 속세의 무리 속에 함께 살고 있어도 영암의 고매한 정신은 여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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