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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헌과 징심록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C0202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종봉

양산 소토리 효충마을은 신라의 충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이 태어난 고향으로서 그 분에 관한 설화와 유적지가 찾아진다. 박제상이 만들었던 정자인 징심헌과 그의 저서인 『징심록(澄心錄)』이 그것이다.

먼저 징심헌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전해오던 이야기와 문헌에 의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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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澄心錄)

징심헌이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박제상삽량주에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직접 징심헌을 세우고, 그곳에서 『징심록』을 편찬하였다는 것과 실성마립간이 강제로 국왕이 되었을 때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징심헌을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두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맞는가를 확실하지 않지만 ‘징심’이라는 단어에서 마음을 맑게 한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으므로 모두 실성마립간의 순탄치 않은 즉위와 관련한 듯 보인다.

징심헌이 처음 건립된 곳은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불렀던 ‘제징심헌시’와 순절 후 양산 사람들이 징심헌 옆에 유사비(遺思碑)를 세웠다는 것에서 효충마을로 추정된다. 그러나 15세기 초 무렵에는 징심헌의 위치가 크게 바뀌었다. 어떤 과정을 거처 그 위치가 이동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양산의 읍성 내에 위치하였던 객사(客舍) 서편에 징심헌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680년 양산군수 조헌경(曺憲卿)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서헌(西軒)이라 불렸다. 1684년 화재로 징심헌은 객사와 함께 소실되었다가 1689년 군수 류정휘(柳挺輝)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1697년 겨울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영원히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1845년 양산군수 한긍인(韓兢人)이 박공의 비가 낡고 퇴색하여 알아 볼 수가 없음을 안타까워 새 비를 객사 서편에 세웠고, 1846년 한긍인의 후손 한규승(韓奎昇)이 비각(碑閣)을 세웠는데, 여기에 박공의 ‘제징심헌(題澄心軒)’ 시판(詩板)이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때까지 현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양산읍성은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 일제의 관공서와 민가가 들어서면서 징심헌 비각과 시판 등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수 한긍인이 건립한 박공의 비는 어느 애향민의 손에 의하여 현 중앙동 사무소 뒤편 느티나무 당산목 아래에 다른 여러 개의 비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다음은 박제상이 저술한 『징심록』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보통 박제상을 충신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는 한국의 고유의 사상인 선도(仙道)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책이 그가 저술한 『징심록(澄心錄)』이다.

이 책은 박제상이 388년(내물왕 33) 왕실도서관인 보문전(寶文殿)을 관리하는 이찬(伊湌)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선도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고향에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집안에서 내려오는 서적까지 두루 참조하여 편찬한 것이다.

『징심록』은 삼교(三敎) 15지(十五誌)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상교(上敎)는 부도지(符都誌)·음신지(音信誌)·역시지(曆時誌)·천웅지(天雄誌)·성진지(星辰誌)이고, 중교(中敎)는 사해지(四海誌)·계불지(禊祓誌)·물명지(物名誌)·가락지(歌樂誌)·의약지(醫藥誌)이며, 하교(下敎)는 농상지(農桑誌)·도인지(陶人誌)(이 외의 3지는 미상)이다. 이후 박제상의 아들 백결 선생에 의하여 금척지(金尺誌)가 추보되었다.

이 책은 그동안 영해박씨 가문에서 필사하여 대대로 비밀리에 전해져 왔다고 하나,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책 내용이 상당히 알려졌던 것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사를 보내 부도의 일을 상세히 물었다고 하며, 강감찬 장군도 여러 차례 영해(경북 영덕)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 한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자 영해박씨 가문의 여러 어른들이 세조찬탈을 인정하려하지 않자 세조는 이들을 박해하였고, 이것은 바로 『징심록』의 피해로 이어졌다. 조선 세조대에 영해박씨 가문과 왕래하던 김시습(金時習)에 의하여 징심록 추기(追記)도 첨가되었다.

『징심록』은 영해박씨 가문이 있던 함경도 문천의 어느 집에서 보관되어 비밀리에 전해져 박제상의 55세손인 박금(朴琴)(본명 박재익)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 보관된 『징심록』을 자세하게 연구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징심록』 원본을 문천 금호종합이학원에 두고 울산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징심록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피난지역인 울산에서 1952년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징심록』을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상교(上敎) 중 1지인 「부도지」를 새롭게 구성하여 세상에 공개하였다.

『징심록』의 일편인 「부도지(符都誌)」는 한국선도 계통의 어떠한 사서보다도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책자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부도지」 속의 사유 체계는 한국선도의 원경(元經)인 「천부경(天符經)」을 보완하는 해석서로서 한국선도 고유의 사유체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 체계에서 연원하여 한국사 및 인류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으니 사서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부도란 하늘의 부름을 받은 도시, 또는 하늘에 부합한 도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도지」는 태초에서부터 부도란 도시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전통이 소멸되기까지의 역사를 밝히는 책이다. 「부도지」는 한민족 최고의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시원을 밝혀주는 위대한 서적이다. 「부도지」를 통해서 우리는 한민족의 고향을 찾을 수 있고 아득한 태고에 일어난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발원지인 마고대성을 접하게 된다.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궁희, 황궁, 유인, 한인, 한웅, 단군에 이르는 동안 천산, 적성산, 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로 들어왔으며, 그 사이 지구상의 동서남북에 사방으로 퍼져나가 천도정치의 한국문화를 전 세계에 심어놓았다.

천부의 한국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메소포타미아, 인도, 이집트, 그리스, 프랑스, 영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를 전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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