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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의 아들 백결 선생 박문량과 방아타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C02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종봉

효충마을에서 태어난 박제상은 금교부인(金校夫人)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낳았다. 그 가운데 외아들이 백결 선생 박문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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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량

그의 이름은 문량(文良) 또는 누랑(婁琅)이요 호는 백결(百結)이다. 5세 때 아버지 박제상은 왜국에서 충절을 지키다 순국하였고, 모친께서는 울산 치술령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다 두 딸과 함께 순절하신 후 홀로 남은 둘째 누이 아영에게 길러졌다.

자비마립간 때 이척찬(伊尺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대령군(大寧君)에 추봉되었다. 고려 때 죽송(竹松) 오서진(塢徐薽)은 박문량을 신라 인물로 곤궁한 처지에서도 참된 즐거움을 가졌던 분으로 기리고 있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박문량의 사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원천석은 고려말 조선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절의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생각을 박문량의 사상에 빗대어서 설명하고 있어 우리는 박문량의 사상적 경향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원천석박문량이 자비왕에게 천재(天災)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상소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임금이 바른 마음과 수양이 있다면 하늘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국왕이 바른 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임금이 이렇게만 한다면 백성들의 참여는 저절로 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태평성대라는 것이다.

또 충신과 역적을 구분하는 것과 선조의 장사를 지내는 방법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박문량은 매우 청빈하였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자 더욱 가난하여 옷 한 벌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백결 선생(百結先生)이라 하였다.

평소 영리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나 거문고를 들고 다니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반드시 거문고를 튕겨 마음을 풀었고 혹시 불평한 일이 있을 때면 역시 거문고 가락에 실어 마음을 달랬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곡조를 만들어 거문고에 싣기를 “하늘이 사람을 내시고 하늘이 사람을 궁(窮)하게도, 현(顯)하게도 하고 하늘이 임금을 얻게 하고, 하늘이 임금을 잃게도 하시네. 얻었다고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닌데, 잃었다고 슬퍼할게 무엇인가! 즐거워야 별것도 아니요 자연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즐거움이네” 하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자 이웃 마을에서 절구질을 하는데 그의 아내가 절구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남들은 다 곡식이 있어 절구질을 하는데 우리만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보낼까?” 하니 선생이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따를 수도 없는 것인데 슬퍼할게 무엇인가?” 하고는 거문고로 절구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하였는데 세상에는 그 곡조를 대악(碓樂: “방아타령”)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의 대학자 운월제(雲月齊) 신현(申賢)박문량을 평가하는 글에서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다.

“충·효가 지극하고 사상이 정대하고 맑아 고금의 역사 속에서도 비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아! 선생의 남겨놓은 자취와 운치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켜 백세 뒤에도 이렇게 사람을 흥기시키는데, 저 물정에 어두웠던 신라 임금은 이러한 신하를 두고도 그의 말을 쓰지 못하였고 당시의 문장가들 역시 선생을 위하여 저서를 남겨 후세를 깨우지 못하였으니 신라의 정치와 문헌이 비루하고 소략하여 후세에 선생의 얼을 평론하는 이들의 개탄을 자아낼 뿐이다.”

현재 효충사에서 아버지 박제상과 함께 봉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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