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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노나라(小魯)의 작은 후작(小侯)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C0402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공은만(81세) 씨를 만났다. 귀 옆에 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망구(望九)의 노인이다. 그런데 휴대전화기를 목에 걸고 있다. 명함을 내미는데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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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구(望九)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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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자신의 이름 위에 곡부공씨대종회 이사 및 양산시종친회 회장이라는 직함 활자 크기가 이름보다 훨씬 크게 적혀있다. 그 뿐만 아니다. 한자 이름 밑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병기되어 있고, “만인의 사람을 알아보면, 만사에 달인이 된다.”는 좌우명도 적혀있다. 공자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딸 둘, 아들 하나는 모두 출가했고, 지금은 노부부 둘이서만 경운기 운전해가면서 농사짓고 살아갈 정도이니 경제적으로는 그저 평범한 촌로이겠지만 한 해 최저 유지비가 50만 원 이상 들어가는 132가구의 양산시공씨종친회 회장직은 유지하고 있음도 공씨에 대한 강한 자부심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공씨라는 데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동래정씨 집성촌이었던 이곳에서 몇 가구 안 되는 씨족이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공씨는 광복되고 난 뒤 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12년 동안 경찰 공무원 생활을 한 뒤 1964년도에 귀향하여 오늘날까지 4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젊은 날의 경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어에 능숙하고, 중국어는 중국 가서 혼자 여행할 정도는 되며, 영어 또한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하다고 한다. 보통의 촌로답지 않게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있으며 젊은 시절 대처에서 지낸 공직생활로 인한 다양한 지식과 상식을 갖추고 있어서일까. 그의 언행에서는 팔순 노인답지 않은 당당함이 묻어나온다.

소노(小魯)마을의 명칭 유래는 소노서원에 봉안된 임란공신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과 그의 동생 노산(魯山) 정호의(鄭好義) 두 사람의 호의 머리글자를 따서 蘇魯라 했다가 뒤에 小魯라 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소에게 들녘의 풀을 뜯어먹게 하던 시절에 마을 뒷산은 소들이 많이 노닐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도 ‘소놀이산’이 되었고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우유산(牛遊山)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마을 이름에서는 ‘소놀이’가 연음되어 ‘소노리’가 되고 다시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小魯里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공씨의 입향조인 증조부가 이 마을을 세거지로 삼은 것도 이 小魯라는 지명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석가나 예수의 성탄일은 공휴일인데, 왜 공자의 성탄일은 공휴일이 아닌가? 불교 다음으로 유교가 오랫동안 국교로 자리하였는데, 들어온 지 2백여 년밖에 안 되는 기독교의 예수 성탄일이 제일 먼저 공휴일로 지정된 것에 반해 공자 탄신일에 대한 공휴일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유림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며 무척이나 안타까워한다.

동래정씨 외손으로서 동래정씨들에게 쓴소리도 마다 않는다. 이웃마을(율리)의 광주안씨 문중에서는 안종석(성균관 부관장·향토사학자), 안종길(양산시장) 등 인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소노마을동래정씨 문중에는 부자는 많이 나와도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공씨들은 시월 초하룻날 많은 후손들이 마산 예곡동의 수원재에 모여 조상을 기리는데, 이 마을 출신 동래정씨 후손들은 소산(정호인) 어른처럼 훌륭한 조상 이하 13대의 선조를 모신 이곳 서원에 참배 오는 후손이 극히 드물다고 일갈하면서 그에 따른 대처 방안도 내어놓았다.

설날에 세배 오면 세뱃돈을 주듯이 문중의 토지를 매각하여 돈이 많은 문중이니 서원에 참배하러 오는 후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참배비를 주라고 한다. 그러면 참배객이 줄을 설 것이고, 인물 또한 많이 나올 것이라 한다. 인물 양성에 투자할 것을 재삼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매장문화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입향조인 증조부 이하 모든 선대의 산소를 파서 화장한 뒤 수목장을 했다고 한다. 자신 또한 그렇게 하도록 유언할 것이라고 한다. 그 대신 부모의 묘지가 공장부지로 수용되면서 받은 보상금을 다른 일로 전용할 수 없겠기에 돈을 더 보태어 직접 제단(祭壇)을 만들 계획이라 한다.

이와 같은 발상은 좁은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묘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대한 것도 있지만, 산업화된 사회에서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쁜 후손들로 하여금 성묘를 제때 제대로 못함으로써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 또한 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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