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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홈’ 땅이름과 물길의 흔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10104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명곡, 명동마을은 행정지명이며, 속칭으로는 홈실마을로 부른다. 그리고 명동 바로 옆 마을 이름은 외홈마을이다. 명곡마을, 명동마을보다 왠지 정감이 가는 ‘홈실마을’. 이 이름은 과연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열쇠는 명동(椧洞)의 ‘명(椧)’자에서 찾을 수 있다. 명(椧)은 우리말로 ‘홈’을 뜻한다. 농사를 지을 때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사용한 홈(椧)이 일제강점기 초에 한자로 바뀌면서 명(椧)이 된 것이다. 마을의 농민들이 가뭄을 극복해가는 지혜가 마을 지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마을 지명에 대한 마을 이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홈 그거는 홈실이라 했는데, 옛날에는 농사를 짓는다고 홈대를 대가지고 농사를 지었거든예. 여짝으로 가다보면 옛날에 뭐를 가지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바위에 홈을 파가꼬 그리로 물을 낸 흔적이 지금도 있습니더. 지금은 뭐 저수지로 해서 농업용수로 만들어서 다 하지만, 옛날에는 여기 물이 억수로 귀했거든예. 그래가꼬 바위를 뭘로 뜯어냈는지는 몰라도 물이 내려가도록 홈을 만들었다 아닌교.”(이자무, 명동마을 이장,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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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내려가는 홈

이를 더 자세히 알아보자. 옛날 시명골은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어 주변의 논밭에 물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시명골의 상, 중, 하에 보(洑)를 막아서 논에 물어 대었다. 그런데 도랑을 설치해 물길을 따라 논에 물을 보내다 보니, 도랑이 길면 물이 땅에 스며들어 논에는 물이 제대로 가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지혜를 짜 낸 것이 바로 긴 나무나 대나무로 홈(椧)을 파고 홈과 홈을 연결하여 논으로 물을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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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골 개울물

이는 자연적인 도랑보다 물이 덜 빠지고 또한 물의 속력도 빨라 농사에 혁신을 가져왔다. 명동의 지형을 보면 시명골 계곡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서 건너편 논밭에 물을 끌려면 골짜기를 거쳐 옆 땅에 물길을 돌릴 수 있으므로, 그 공간의 물길은 홈이 아니면 물을 보낼 방법이 없었다. 홈의 연결은 밑에 장대 받침을 세우고 그 위에 홈과 홈을 연결했다. 요즘 같으면 비닐호수나 철 파이프로 별 문제없이 물길을 만들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홈’이 신발명품 특허 제1호로 인정받았다. 매년 물을 보고도 물을 끌어내지 못하고 애를 태우다가, 신발명품 ‘홈’이 생겨 풍년농사를 지어 집집마다 창고에 곡식이 꽉꽉 차니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 풍년제를 올리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현대농업이 서기에는 수많은 변천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하여 왔다. 특히 벼농사의 관개방법으로는 개울이나 하천의 흐르는 물을 그대로 도랑이나 홈으로 직접 유인하여 사용하다가 물을 저장하는 양을 늘리기 위하여 보(洑)를 막아 물의 양을 늘려 사용하였으며, 다음으로는 개울이나 하천 등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일 년 내내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이렇게 명동마을은 먼 옛날 농경시대에서 논에 물을 공급하는 한 방법으로 홈(椧)을 개발하여 가뭄을 이기고 부자마을로 거듭났다. 홈은 명동 사람들의 삶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늘날 마을이름을 홈실, 명동(椧洞), 명곡(椧谷)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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