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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으뜸가는 소리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3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냉수 한 모금으로 입과 목을 축인 김필연(75) 할머니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벽면에 허리를 붙이고 “흠- 흠-”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금세 구성진 가락을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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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연(75)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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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기 노래

▶ 면면히 이어져 오는 구성진 우리의 소리

“한강에 이 모를 부아 그 모찌기도 난감하네. 하늘에다 목화 심어 이 목화 따기도 난감하네. 만장 같은 이 모자리 장기판 만치 남었구나. 장기야 판은 있다마는 장기 뜰 이가 그 누군고”

긴 모찌는 소리다. 할머니의 노래가 산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같이 너울거린다 싶더니 바로 잦은 모찌는 소리로 넘어간다.

“밀치라 닥치라 모도 잡아서 훌치소영해 영천 초목에 호미야 손을 놀리소조루자 조루자 이 모깡을 조루자조루자 조루자 각시 비집을 조루자조루자 조루자 영감 쌈지를 조루자조루자 조루자 며느리 시애미를 조루자”

모찌는 소리가 끝나고 소리 장단이 조금 느려지면서 모심는 소리로 이어진다.

“늦어온다 늦어온데이 모심기가 늦어온다이 물기 저 물기 헐어놓고 이 집네 양반 어데 갔노문에야 대전복 손에 들고 첩의 방에 놀러갔네농사야 법은 있건마는 신농씨가 없을 소냐태고 때 시절이 언제라꼬 신농씨를 이제 찼노모야모야 노랑모야 니 언제 커서 환승할래이 달 크고 훗달 커서 내 훗달에 열매 연다새벽 같은 저 밭골에 반달 각시 떠나온데이지가여 무슨 반달이고 초싱달이 반달이지소주 고고 약주 뜨고 국화 정자로 놀러가자우리는 언제 신선되어 국화 정자로 놀러가꼬오늘 해가 요만 되먼 골목골목 연개난데이우리야 임은 어데 가고 연개 낼 줄 모르던고해 다 졌네 해 다 졌네 양산 땅에 해 다 졌네 방실방실 웃는 아기 못 다 보고도 해 다 졌데이”

김필연 할머니의 목소리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힘을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소리가 빨라진다.

“쓸쓸이는 어데 갔노. 쓸쓸이가 산에 갔다 있는 데를 알았으니 오거들랑 보고 가소이- 후후후후-”

이렇게 쓸쓸이 소리를 끝으로 구성진 모심기 노래가 마무리 된다.

이 노래가 바로 웅상농청장원놀이의 모심기 노래이다. 먼 옛날, 우리네 조상들로부터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그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이 소리는 모내기를 위해 모판에서 모를 찌고, 모를 심으면서 지루함을 덜고 때로는 힘듦을 이기기 위해 함께 부르던 노동요(勞動謠)이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와이구 대다. 하하하- 평소 때 나는 앞소리 하먼 뒷소리 하는 사람 있거든예. 그라먼 좀 숨이 안 가쁘고 이런데, 와이구 내 나이가 금년에 75살 이라논께 대네.”라며 숨을 고르는 김필연 할머니. 그는 2002년 4월 4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된 웅상농청장원놀이의 모심기 노래(동영상) 기능보유자이다.

웅상읍 명동을 무대로 이어져 오는 이 놀이는 마을 농사꾼들이 공동으로 농사일을 마치고 마을에서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을 장원가로 선정하면 그 장원가가 낸 술과 음식의 장원턱을 나눠 먹으면서 며칠 동안 한 해 농사일의 힘겨움을 풀고 풍년을 구가한다는 내용을 상황의 순서와 동작에 따라 소리를 곁들여 입체화한 놀이로 힘겨운 농사일을 마을 공동으로 해내는 작업과정과 당시의 농경의례를 보여 준다.

웅상농청장원놀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인 1999년 6월 제30회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장려상을 받은 바 있다. “그 때 우리 1등 해가지고 왔심더. 우리 제주도 가가지고예. 일주일 이걸 배워 갖고 하는데 그날 해필 비가 와서 안에서 했거든예. 터가 적다보니 줄로 잘 못 쳐가지고 그만 실수를 좀 했거든예. 그래도 상 받았다 아입니꺼.”라며 아직도 그 때의 감동과 아쉬움이 남은 듯 보였다.

▶ 힘든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노래

김필연 할머니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기까지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고 한다. “이것도 시험을 봐가 해 주데요. 그 때 문화재전문위원 박사들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노래 좀 하겠다 싶은 사람들 회관에 다 나오라 해 가지고 차례차례 노래를 불러보라 하더라고. 노래 부를 사람 노래 부르고 맡은 역할이 다 있거든예. 그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하루만 하는 게 아니고 계속 나오라 하더라고예. 계속 연습을 시켜보더니 ‘김필연 씨는 됐다.’하면서 나를 기능보유자로 뽑더라고예. 잘했는가 못 했는가 그거는 모르겠고……”라며 기능보유자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김필연 할머니는 좌상의 박철수, 논매기 노래의 이유락과 함께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이유락 씨는 진짜 잘했심더. 너무너무 초성이 좋고 그랬는데……”라며, 2년 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석함으로 말끝을 흐린다.

연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이어졌다. “그 사람들이 웅상초등학교 데리고 들어가서는 앞으로 이걸 익히라고 하면서 가사를 써 주더라고예. 가사를 보고 해야 되는데 못 보고 하라고 하니 죽겠는 거라예. 우리가 양산으로 어데로 공연하러 가먼 적은 거를 못 가져가라고 하고 다 외워서 내 머릿속에 담아가지고 차례차례 순서대로 해야 된다는 거라예.”

그 후, 정형화 된 가사를 익히기 위해 김필연 할머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적어가지고도 안 되겠고, 며느리랑 손자들 보는 데서는 안 되겠는 거라예. 그래서 2층에 올라가서 혼자 문 잠가 놓고 노래 연습하고, 아침저녁으로 저 산에 올라가서 내 혼자 계속 외웠는 거라예. 결국 다 외웠제. 인자는 공연 하루 한 번씩 하라고 해도 안 보고 마음대로 다 할 수 있거든예. 그때는 너무 힘들더라고예. 산에 올라가서 내 혼자서 고함 질러가면서 머리에 담느라고 혼났심더. 차례차례 책대로 그대로 해야 되거든예. 인자는 수월슴더.”며, 힘들었던 그때의 시간들을 잘 이겨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 힘든 과정을 거친 후, 마이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는 가슴 뿌듯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난 시절, 모심기 노래를 하던 때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내 클 때 이야기 해보까예? 우리는 그 당시에는 배가 너무 고팠심더. 그런 이야기를 할라하먼 눈물 나지. 밥을 제대로 못 먹고 모를 숨굴라 하먼 배도 고프제, 날씨가 좋으면 괜찮은데, 비 오는 날은 삿갓 그놈 덮어쓰고 이래 숨구먼 샌날(비가 올 듯이 구름이 낀 날)은 손도 시럽고 냉중에는 춥고 모포기를 어디 심었는지 모르고. 우리가 그래 다 고상해 가머 모를 숨구고, 이래 엎드리가 숨구먼 지어버가지고 이런 노래를 배워가 하는 기라예.”라며 삶이 고달팠던 때의 이야기를 노래하듯 줄줄 풀어낸다.

“일하다보면 지겨우니까 이- 호호호 손뼉도 치고, 허리 아프고 이럴 때, 서로서로 아무꺼시나 노래하고 하이 우리가 시간 잘 보냈지예. 그라믄 시간 잘 갔슴더. 모 숨기가 훨씬 수월했지예. 그라니까 일 했제. 우리 젊을 때 처자들은 무조건 엎드려 모 찌고 나면 너무너무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터져 나갈라 하제. 힘든 거 그거 말 다 못합니더. 못줄 넘길 때 겨우 한 번 씩 허리 펴고, 어떨 때는 못줄 이래 거머쥐고 아이구- 이래 할 때도 있고 그랬다 아인교. 너무너무 답답하이까네 노래를 지어 불렀는 기라. 그래그래 한 기라예.”라며 일어서서 허리 펴는 시늉을 해 보인다.

지금이야 대부분 넓은 논을 이앙기로 왔다 갔다 하면서 기계로 모를 심지만, 못줄 튕겨가며 사람 손으로 일일이 모포기를 무논에 꽂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 손을 맞춰가면서 해야 하니 허리가 아파도 제대로 펴지도 못했을 것이다. 노동으로 인한 피곤함을 노래로 풀고, 삶의 고단함을 노래로 달래며 그렇게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가 가고, 세월은 물 흐르듯 흐르고……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보다.

김필연 할머니는 결혼 전에도 노래 잘하기로 소문이 났고, 결혼해서도 일하러 가면 “반동댁(김필연 할머니의 택호) 노래해봐라.”며 제일 먼저 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잘하는 사람 자꾸 하라 하거든예. ‘누구 해라. 누구 해라.’하먼 서로 같이 노래하고 그랬지예.”라고 말한다. 그러보면 김필연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으뜸 소리꾼이었던 것 같다.

명동의 으뜸 소리꾼, 명동의 인기 스타

김필연 할머니의 친정은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이다. “신랑이 해군이거든예. 그때 웅상에서는 해군이 우리 신랑 한 사람 뿐이더라고. 우리 신랑은 일본에서 학교 나와 가지고 일본 나고야 고향이라고 하더라고. 우리 친정할매하고 시할매가 갑장이던기라. 우리 동생이 다리가 아프니까 우리 할매가 시할매한테 ‘아무꺼시야 니 우리 머시기 다리만 낫아주먼 피란이(당시 집에서 부르던 이름) 니 주꾸마.’ 그래 이야기를 했어예. 그래 가지고 신랑하고 20살에 결혼했지예. 신랑은 24살인데 4살 차이는 아무 것도 볼 것도 없다 안 합니꺼.”라며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김필연 할머니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들은 공무원, 사업,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딸들은 서면, 통영, 해운대 신시가지에 살고 있다. 할머니는 큰아들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손자들 학업 때문에 분가를 시켰다. “저거는 내 때문에 안 나갈라 하더라고예. ‘그래 아이들 공부 다 시켜놓고 들어오너라. 엄마는 우째 해도 산다.’ 그랬다 아입니꺼.”며 언제나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부모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노래는 목소리가 생명이다. 목소리를 잘 유지하려면 건강을 챙기는 건 필수이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자랑이 아니라 잘 했거든예. 나이가 들수록 목이 자꾸 가더라고. 꺼끌꺼끌 하는 말이 나오더라고. 지금도 보이소. 인자는 어글어글하는 소리가 납니더. 옛날에는 카랑카랑 했는데……”라며 자신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음을 걱정한다.

“나는 항상 등산을 댕김더. 지금도 등산을 댕기거든. 물 끓여 넣고 밥 딱 담고 어디든지 댕김더. 내원사 천성산 안 다니는 데가 없심더. 겨울에 댕기제. 봄에 댕기제. 여름에도 서운(시원)할 때 댕김더. 그래 산에 가먼 내 혼자서 고함지르고 소리도 하고……”라며 평소 자신만의 건강관리법을 소개한다.

그는 요즈음 노인대학에서 장구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또 밭에 나가서 일 하기도 하고 노인회관에서 친구들과 지내기도 하고, 곳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을 때마다 모심기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텔레비전 방송에도 출연해서 7남매 자식들 이름이 들어간 가사로 노래를 불러 좌중의 박수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단다. 웅상농청장원놀이 모심기 노래 기능보유자 김필연 할머니. 그는 명동의 으뜸 소리꾼이자 스타임이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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