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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속의 홈실댁 기억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302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이조기(1887~1983, 명곡 출생)는 홈실댁으로 불리워졌다. 명동 본마을 이름이 홈실인 것처럼 그이 일생에는 홈실 마을 사람들의 옛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며

홈실댁은 명곡에서 1887년에 출생하여 열다섯 살 되던 해 이웃한 백동마을의 26세의 늙은 총각(당시 평균 결혼연령 20세)에게 시집갔다. 그 시절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는 물어보는 일조차도 없이 부모님과 대소가의 의사가 결정되면 당사자는 무조건 따라야 했다. 부모가 울산박씨 가문의 총각을 선택한 것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명문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소시에 초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도 초시 이상의 과거 응시를 거부하고 청빈한 선비로서 일생을 보낸 울산 고을 선비 중의 선비였다. 지고한 선비의 후예라는 사실 하나로 뼈대 있는 가문의 값진 선택이라며 친정아버지는 항시 명예스럽게 생각하였다.

남편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기거할 데가 없어 큰집 일을 도우며 의탁하거나 네 분 누님들 집을 전전했다. 오갈 데가 마땅치 않을 때는 들판의 볏가리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낸 날도 많았다. 결혼할 때까지 머슴살이를 14년 동안이나 했다. 어린 나이 때는 입치레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힘에 겹도록 일을 하면서도 쫓겨나지 않는 것만 다행으로 알았을 뿐 세경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열세 살 때 비로소 세경으로 쌀 10되를 받았고, 열네 살 때 20되를 받았으며, 열다섯 살 때에야 한 가마를 받았다. 그 뒤 세경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 세경을 몇 년간은 가난한 선비였던 종형 생활비로 드렸고, 이후 몇 년간은 누님에게 맡겨 얼마간의 땅도 사고 집도 마련하였으며 장가도 들었다.

남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철도 없었을 때에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어머니가 남기고 간 화롯불은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럽다 하며, 할머니가 주신 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큰집에서 종형수가 신주 모시듯 관리하는 화롯불을 분양 받아왔다. “임종하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불씨를 꺼트리지 말고 며느리에게 물려줘야 된다.”는 종형수의 당부 말씀을 듣고 홈실댁은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한 번도 화롯불을 꺼트린 일이 없다.

▶ 자식들의 교육

남편은 머슴살이를 20년은 채우겠다며 결혼하고도 6년간을 더했다. 그런 성실함으로 인해 생활도 그런 대로 안정이 되었다. 그 사이, 아들 셋, 딸 하나도 낳았다. 선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생활이 어려워 학문을 닦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에게만은 공부를 시키고자 두 아들을 서당에 보냈다. 둘 다 머리가 영리한지 공부하는 속도가 다른 집 아이들을 훨씬 앞지른다고 해 참 듣기가 좋았다. 그런데 서당 훈장의 아들이 큰아들보다 한 살 아래고 작은아들보다 한 살 더 먹었는데 큰아들이 자주 훈장의 아들에게 맞곤 했다.

형이 맞을 때마다 작은아들은 훈장 아들이 문밖으로 나오기를 숨어 기다리다 문밖에 나오기만 하면 멀리 끌고 나와 형이 맞은 몇 배를 때려주었다. 훈장댁에서는 작은아들을 타일렀지만 듣지 않고, 집에서는 서당에 간다고 하고서는 서당에는 가지 않고 개울이나 들과 산에서 놀다 서당 끝날 시간이면 집으로 왔다. 아무리 졸라보아도 서당에는 가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였다. 큰아들은 더 많은 학문을 닦게 하기 위해 통도사 부설학교로 보냈다. 남편은 아들 수업료로 한두 달 간격으로 쌀 한 가마니를 백동에서 천성산을 넘어 통도사까지 져다 바쳤다.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쓸 것 쓰지 않고 살아서 당시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될 수 있는 유권자가 웅상읍 전체에 35명 정도 되었다고 하는 데 남편도 거기에 포함될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자경농가가 되었다. 큰아들이 결혼한 이듬해(1926년)에 경마장에서 투기를 해 자신의 재산 전부와 맞먹는 엄청난 돈을 잃어버리고 집에 오지도 못하고 명곡 외가댁에 머물고 있었던 적이 있다.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불러 모아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하고 절대 원망이나 욕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한 뒤 처가댁에 있는 아들을 데리러갔다.

아들이 흘리는 참회의 눈물을 보고는 “큰선비 되라고 저 높은 천성산을 넘어 가쁜 숨 몰아쉬어가며 그 먼 길을 쌀가마니 져 날랐는데, 그까짓 작은 살림 좀 축냈다고 남자가 눈물을 보이다니. 남자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와 부모가 세상 버린 때다. 살림 잃은 것에 대하여는 하나도 억울한 것이 없는데, 네 처신함에 있어 대범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 하시며 진 빚을 모두 갚아 주고는 일생동안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다.

▶ 자식들의 성장을 보며

가세가 기울어 살아갈 다른 방안을 찾던 중 한 지인의 연고로 웅촌면 석천에 소작할 논이 있어 1927년경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20여년을 살았다. 홈실댁은 학성이씨이기는 하지만 농소파였으나 석천은 학성이씨 서면파의 집성촌이었기에 그들의 세도에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홈실댁은 자식들에게 학문이 아니면 힘으로라도 그들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지시켰다. 그래서인지 근동에서 학문으로서는 또래 선비 중에서 큰아들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둘째아들은 농사일에서나 길흉사시 하는 일에 근동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셋째 아들은 왜소한 체구로도 웅촌 씨름대회에 나가면 항시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했다.

큰아들은 선비로서 나날이 풍류만 즐겼다. 관리로 나아갈 것을 주변에서 권유했지만 주권을 잃은 나라에서 관리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아 간 강도들에게 우리 백성들의 살을 더 깊게 베라고 칼을 갈아주는 일이라 하며 관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남편의 뜻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습이었다. 자식들이 주장이 강해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청장년들이 회의를 해 공동으로 괴롭힐 때도 굴하지 않고, “너희들이 힘으로 한다면 우리도 힘으로 대응하겠다.”며 백동에 있는 건장한 일가 20~30명을 불러(그 중에는 김해, 양산, 울산지방에서 제일가는 씨름꾼도 있었음) 놓고, “너희들이 떼거지나 힘으로 우리를 누른다면 우리도 그렇게 너희와 대응하겠다.”하며 화친할 것을 요청한 뒤부터는 전처럼 무시하지는 않았다.

생활도 안정되어 가고 마을에 정도 들고 할 때쯤 남편이 몸져누운 지 한 달 채 못 되어 62세 되던 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일정 치하인 그 시절에는 공동묘지 외에 묘지를 쓰게 되면 처벌을 받던 때라 밤에 장례를 거행해야만 했다. 밤중에 상여를 이동하고 묘를 썼지만 석천 사람들이나 백동사람 온 마을에서 나올 만한 사람은 다 나와 자신이 상주된 자세로 협력했다.

그 시절에 나이 많은 신랑감을 선호했던 것은 나이 든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징용과 징집에서 면제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한 사람도 호기가 되었다. 또한 시집을 간 처녀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아 안심을 할 수 있던 때라 맹인·농아나 팔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징용과 징집이 면제되었기에 좋은 색시감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승산 없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하다 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짜고 짜도 나올 것이 없는 한국인에게 일본국민이라 세뇌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 허울 좋은 애국이라는 이름하에 언어를 빼앗았다. 갖은 공출 제도를 만들어 주곡, 잡곡, 솔가지 기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놋그릇마저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수탈해 갔다. 호구지책을 위한 면사무소의 급사마저도 성씨를 개명하지 않으면 일본국민이 아니라고 못하게 하는 등 성씨개명을 종용했다. 정신대, 징집, 징용, 인간 공출도 행정 단위로 공공연하게 배정하여 충당하다 부족하면 참새 사냥하는 것보다 더 가볍게 길거리에서 청춘남녀를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우리 땅을 멋대로 앗아가 국유화 내지 일본인들의 사유화하고 각종 유물을 도굴하고 빼앗아 갔다.

온 민족이 그토록 열망하던 광복을 맞이하자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도자란 사람들은 애국한답시고 권력 투쟁을 일삼으니 나라는 나아갈 길을 잃었고, 의기 있는 젊은이들은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여 자기 패가 아니면 죽이는 것이 예사였다. 큰아들은 이제 국권을 찾았으니 나도 무엇인가 해야 된다며 1946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철도 공작창에 납품업을 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이사했다.

석천마을 청년들 다수가 좌익세력에 가담하였다. 그때 셋째아들도 20대 중반기로서 넘치는 혈기를 온통 좌익운동에 앞장서, 형이 아무리 달래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뒤에 안 일이지만 웅촌면 좌익간부를 맡아 경찰 통신시설을 자주 파손하고 전주를 온통 다 베어낸 일도 있다고 한다.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 기물을 파괴하고 경찰 때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고도 들었다. 어느 날 경찰이 셋째에게 수갑을 채워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동생을 구한다고 둘째는 농사일이고 뭐고 다 제쳐둔 체 날마다 어디론가 다녔다. 셋째가 잡혀간 지 한 달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체나 다름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니,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 큰일을 하는 지는 뒤에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소리만 했다. 빨갱이 간부가 바로 홈실댁의 셋째아들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집안에 경찰 간부가 있어 그분 힘으로 총살당할 것을 면하고 겨우 풀려났던 것이다.

셋째가 풀려나자 둘째는 이곳에 있다가는 동생이 이북으로 넘어가든지 잡혀가 죽을 것이 뻔하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셋째는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하며 가지 않으려고 때를 쓰기만 했다. 홈실댁은 백동에는 두고 온 토지도 일부 남아 있고, 명곡에 집안도 더 많고 외가도 있으니 명곡으로 가자고 회유하여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을 세를 얻어 1948년 여름에 이사를 했고, 친정오빠의 땅을 일부 얻어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안과 외가가 어울려 사는 마을이라 온 지 한두 달 지나도 나무를 베어간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 산에서 베어가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초가삼간을 지어 흙도 채 마르기 전에 장판지도 바르지 않은 상태에 거적을 펴고 동짓달에 이사를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웅상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산과 동부 경남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 나라가 초토화 되었다. 그래도 요행이 웅상 지역은 직접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집 건너 사상자 가족이 생겨났다. 젊은이란 젊은이는 집집마다 전쟁에 끌려갔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홈실댁 장손의 또래들은 모두 군에 갔는데 장손만 군에 가지 않은 걸 보면 돈이나 권력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빽이 없어서 죽어간다. 돈이 없어 죽어간다.”는 말이 흔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셋째아들은 남 형제 중 막내고 둘째아들과는 아홉 살이나 떨어져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막내를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애 취급을 했고, 홈실댁도 그런 눈으로 보았다. 좌익에 가담하여 풀려나올 때 시체와 같은 모습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홈실댁은 평생 그 충격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막내아들은 사상 불순자로 요시찰 인물이 되어 평생을 한 달에 1회 이상 정보당국으로부터 사생활을 조사 받았다. 그때마다 홈실댁은 ‘또 잡혀갈 것이 아닌가? 행여 또 가담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 때문에 더 옆에다 끼고 살았다. 연좌제는 1990년경까지 실시되었다. 그로 인해 친인척이 공직자가 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홈실댁은 늘 가슴 아파했다.

▶ 홈실댁에 대한 기억의 모습

딸이 1974년 49세로 죽었을 당시 홈실댁의 나이가 88세나 되었지만, 젊은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했다. 어머니 잃은 손자들이 안쓰러웠던지 거처는 작은아들 집에서 그대로 하면서 아침나절은 딸네 집 일을 하고 오후에는 막내아들 집 일을 했다. 아흔 다섯 운명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하다, 돌아가시는 그날도 사위 집 콩 한 가마니와 작은아들네 콩 반 가마니를 타작하고 저녁에 운명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일을 하지 말라고 말리면 “나는 일할 때가 제일 편하다.”며 신앙처럼 일을 했다. 홈실댁은 자주 “나같이 죄 많은 년이 모든 것이 복에 겹다.”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를 아끼면 산신령이 복을 주고, 물을 아끼면 용왕님이 복을 주고, 곡식을 아끼면 하늘과 땅이 복을 준다며 정성을 다해 실천에 옮겼다.

소죽을 끓이고 부엌에 남은 불덩이를 화롯불에 담고 남으면 숯을 만들든가 딴 부엌에 옮겨 다른 용도로 사용했고, 맑은 물은 세수하고 발 씻고 걸레 빤 뒤 남은 물은 마당의 먼지 나는 곳이나 꽃밭에 뿌려주었다. 데워진 물을 버려도 완전 식히지 않고는 버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버리면 땅속에 미물이 뜨겁다며 식은 뒤에 버렸다. 버려진 쌀 한 톨, 한 알 밥이라도 있으면 다 주워 씻어 가축 먹이로 사용했다. 밥을 먹고 난 후, 밥·국·반찬 그릇까지 차례로 물을 부어 씻어 그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밥을 먹어야 체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음식을 먹다 남기면 출세하지 못한다며 남은 음식을 누가 먹든 다 먹게 하였다.

갖가지 민간요법을 이용한 약을 구해 헛간에 달아 놓고 이웃 사람들이 아프면 손수 달이거나 조제하여 갖다 주었다. 마약인줄 아는지 모르는지 양귀비를 채소밭에 많이 길러 약재로 사용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약재를 재배했고, 산돼지 쓸개나 꿩, 산토끼까지 말려 상비약으로 메달아 놓았다.

풋감을 주워 홍시를 만들든가 고구마, 무, 찐쌀, 밀 볶은 것이나 시래기 뿌리 삶은 것 등 군것질 거리를 장만하여 누가 오든 무엇이라도 주었다. 집에 손님이 와 무엇이든 대접해야 하는데 손님이 먹지 않고 그냥 가겠다하면 “우리 집에 오신 손님 물 한 모금이라도 먹지 않고 가면 우리 집 못산다고 하는데 우리 집 못살아도 좋으냐.”며 기어이 무엇이든 들고 가게 했다. 궂은일을 하면서도 옷매무새는 늘 정갈하게 하고 있었다. 잘 때 외에 누워 있는 일이 없었다. 밤샘을 할 경우에도 반절할 때의 자세 즉 한쪽 다리를 접어 눕히고 한쪽 정강이를 세운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부채를 부쳐도 자신을 향해 부치지 않고 앞서 앉아 있는 자손들이나 다른 이를 향해 부쳤다. 네가 시원하면 내가 시원하다 하셨다. 신앙을 가지지 않으셨지만 성직자와 같은 생활을 하셨다. 글자 한 자 모르는 이였지만 어떻게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홈실댁의 일생만 그러한 게 아니라 그때를 살다간 우리네 어른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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