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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성내리 기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101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북부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기혁

양산시의 도심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커다란 돌들이 너부러져 있다. 산에서 굴러온 돌들도 아니다. 어떤 돌들은 축대 속에 끼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의 돌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돌들이 양산초등학교 주변에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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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들

과거의 역사는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사료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며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사람들의 발 뿌리에 채이기도 하고, 혹은 전혀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은 양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향토 역사의 산 증거들이다. 옛 고을의 중심에는 읍성이 있었다. 읍성의 성곽은 역사시대 중심공간이었다. 고을은 읍성을 중심으로 지켜져 왔다. 때로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도 하면서 지방민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왔다.

현재 양산의 도심부에서 지나치듯 발에 채이는 이 돌부리들이 바로 조선시대 양산 고을에 있었던 양산읍성의 흔적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읍성의 흔적은 어떠한 것일까? 과거의 그 도도한 기상이 조금은 느껴질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현재의 읍성을 함께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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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리들

경부고속도로 남양산IC에서 나와 통도사 방향으로 35번 국도를 따라 오다보면 오른쪽에 양산시청이 보인다. 위로 올라가 107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오른쪽에 양산초등학교, 좌측에 양산문화원을 만나게 된다. 벌써 읍성 안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과거 읍성의 모습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것마저도 성벽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이 성벽들이 언제 허물어 졌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읍성의 흔적을 찾아 옛 고서를 살펴보면 양산의 옛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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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마을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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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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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총수

『호구총수』에 의하면 18세기 읍성마을은 양산의 ‘읍내면 성내리(城內里)’였다.(『호구총수』 제8책, 양산) 성내리라는 이름을 듣고 다시 본 읍성마을은 어렴풋이 그 당시의 우뚝 솟아 지켜주던 성곽의 풍채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성돌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양산의 읍성마을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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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끝이 보이지도 않는 성벽이 감싸 앉고 있다. 높은 성벽은 고개를 어디까지 들어야 그 끝이 보인다. 커다란 성문은 성벽과 나란히 위엄 있게 서서, 성 밖에 사람과 성 안의 사람을 구분하여 성 안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임을 알린다.

성 안에는 관아터와 객사, 군수관사 쌍벽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관아터를 중심으로 읍성 성벽을 둘러싸고 읍성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성안의 구성 요소만 하더라도 읍성마을의의 자존심을 세우기에 충분하다. 성내리 사람들의 얼굴에는 성안에 살고 있다는 자존심 가득한 얼굴로 도도함이 흐른다. 성안에 있다는 든든함 때문일까, 성 안 사람들의 모습은 밝고 활기차 보인다. 그들의 얼굴을 뒤로한 채 타이머신은 다시 구한말의 조선으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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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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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관사

읍성의 모습은 변하였다. 좀 전과 달리 읍성의 모습이 부분 부분 허물어져있다. 구한말 조선정부의 통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읍성들을 점차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더 지나 일제강점기로 가 보자. 일제강점기에 들어 객사와 관아는 일제의 통치 용도로 변경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읍성마을은 마을 사람들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읍성마을은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1918년, 일제는 양산군 ‘읍내면(邑內面)’이라는 이름은 ‘양산면’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성내리’라는 지명도 지우고, 성내리북부동, 중앙동, 남부동에 편입시켜 버린다. 이는 지방에 투영되었던 조선왕조의 흔적을 없애려는 일제의 저의가 반영된 것이다. 1930년대 초에는 지방 신작로의 개설로 도로가 직선화되고 과거 읍성마을에 있었던 미로들조차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성내리라는 지명을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직선화된 길로 인해 이제 조선시대 성내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변했다. 너무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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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주춧돌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

해방 이후에는 도시화로 택지가 조성되면서 성벽들은 주택의 주춧돌로 이용된다.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찌른다. 성벽 해체는 가속화되어 갔다. 1979년, 양산면이 읍(邑)이 되었고, 1996년에 양산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중앙동·삼성동·강서동으로 나누어짐으로써 신설되었다. 행정동인 중앙동은 법정동인 다방동·남부동·중부동·북부동·명곡동을 관할하고 있다. 현재의 읍성은 대부분 북부동에 위치한다. 이제는 양산에서 읍성의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것마저도 성벽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성돌이 타임머신은 현재에서 다시 멈췄다. 조선시대 성 안 사람들의 그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데, 이렇게 허무한 모습으로 단순한 돌덩이처럼 남아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나마 오랜 세월동안 우리와 한 공간에 남겨져 있음이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미래로 넘어가면 또 다시 읍성마을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모른다. 미래의 읍성마을은 조선시대의 그 기상을 품고 성곽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 활기까지 복원 되어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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