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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양산의 성(城): 황산성 삽량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102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북부동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종봉

양산읍성의 처음 축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양산의 옛 지명이 삽량주이므로 성의 이름도 삽량성이었다. 고대 문헌에서 등장하는 삽량성의 기록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양산읍성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3, 463년(자비마립간 6) 2월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현재의 석성의 형태는 아니겠지만 463년(자비마립간 6) 이전에 양산에 삽량성이 존재하였음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는 이 삽량성을 재건축하였다.

여러 차례 『삼국사기』에서 그러한 흔적이 보인다. 통일신라 신문왕 7년에 ‘양주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260보였다.’는 기록에서 삽량성을 개축한 기록과 함께 그 규모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면서 경상도를 상주와 삽량주로 나누고 경덕왕 대에 삽량주를 양주로 개칭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양산의 속현은 동래(지금의 동래), 동평(지금의 부산 당감동 일대), 기장현이었다. 그만큼 막강한 위상을 자랑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양주를 재건축하고 그 규모가 적지 않았던 것도 양산의 위상에 걸맞는 읍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가면 그 양상은 상당히 달라진다.

고려의 수도가 개성으로 옮겨진 이후 상대적으로 양산의 위상은 낮아져서 속현은 기장현과 동평현으로 축소되고, 기존의 동래현은 신설된 울주군의 속현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고려시대에도 계속 이곳은 양산의 행정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 말에는 양산읍성이 왜구의 침략으로 거의 파괴되어 읍성에 살았던 양산 백성들은 지금의 부산 당감동 일대에 있었던 동평현성에 옮겨가 살았다고 한다. 이후 왜구의 침략이 거세어지자 다시 성을 건축하자는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서 고려 마지막 국왕인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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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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