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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윤현진 의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20104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향토사연구회

일제시기 대표적 독립운동가 윤현진(尹顯振)[1892~1921]은 부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어, 부산광역시에서 출판되는 각종 책에 소개되어 부산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윤현진은 부산 출생이 아니라 1892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윤홍석[1843~1902]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냈고, 아버지 윤필은은 동래부사,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감리서를 지냈다. 윤현진은 그야말로 구한말(대한제국말)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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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어려서부터 능력이 특별하여 만성재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하니, 10세 때 경서에 능통하였다. 1908년 숙부 윤상은이 세운 구포구명학교 제1회를 졸업하였고, 그후 중국 남경, 북경, 상해 등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외국의 여러 인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12년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과에 유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 총무로 일했다. 학우회는 1914년 4월부터 『學之光』을 발간하였는데, 윤현진은 학지광 제5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윤현진은 1915년 경 일본에서 김철수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1916년 초에도 김철수, 정노식, 장덕수 및 중국인들과 신동아동맹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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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구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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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之光』

그 뒤 귀국하여 1917년 고향인 양산에 꿈나무인 청소년들을 교육시키는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형인 윤현태가 백산무역 400주를 보유하면서 대주주로서 참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백산상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1919년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윤현진은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것은 1919년 3·1운동과 연관을 있을 듯하다. 그는 당시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마산 혹은 고향인 양산에서 3·1운동을 하였고, 이는 일본의 탄압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를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0일경 울산의 민족주의자 김홍조와 함께 상해에 나타났다. 윤현진은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국사일지(國事日誌)』를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고 조선 8도와 해외 3지역을 포함한 11개의 지방의원을 선거하였다. 그 때 윤현진김창숙, 유경환, 김정묵, 백남규, 김갑 등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리고 임시정부는 각 부서별로 위원제를 채택하였는데 신익희 등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7월 제2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윤현진은 재무위원장과 외무위원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8월 국민법령으로 임시정부의 부서를 위원제에서 차장제로 변경하였는데, 윤현진은 차장으로 임명되어 1921년 3월 22일까지 재임하였다. 윤현진이 재무차장을 맡게 된 것은 안창호의 계속된 설득과 함께 그의 자금 조달능력이었다.

『국사일지』에는 윤현진이 임시정부의 재정확보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한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회사를 설립해 주식회사 기금을 확보하고 회사를 운영해 자금을 조달하자는 구상을 제안한 내용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은 그의 형인 윤현태와 관련이 깊다. 윤현태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백산무역의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1919년경에는 양산 지주들과 함께 일금상회를 경영했고, 1920년 초에는 양산에서 의춘양행을 운영하였다. 윤현태의 적극적인 회사활동은 윤현진의 조금조달에 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이는 황임성의 경찰심문조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윤현진김구, 김순애, 김철, 손정도 등과 함께 상해에서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의용단은 국내조직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들이 나중에 선전과 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윤현진은 1921년 9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30세로 요절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독립하지 못하면 내 유골을 고향의 선산에 묻지 말며 내 자녀를 결혼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에서도 ‘형극 배일수완가 윤현진의 死(일본에 대항하는 수완가인 윤현진의 죽음)’라는 제목 하에 실렸다. 그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임시정부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등이 참석하여 애도했다. 뒤늦게 그의 형 윤현태는 다른 나라에서 죽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상해 정안사의 윤현진의 묘소에 ‘윤현진 묻음’이란 비를 세웠다.

양산에서는 지역의 관과 민들을 중심으로 1959년 춘추원 내에 비를 세워 윤현진을 추모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6월 그의 유해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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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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