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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상처, 국민보도연맹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20105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명환

우리나라 근현대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도 큰 사건인 6·25 전쟁. 이 시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국 어디를 가도 남아있고, 또한 양산읍성도 6·25 전쟁에 대한 아픈 흔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이러한 흔적들도 점점 흩어져가고 있지만, 아픈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기억만큼이나 오래 남아 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해방 직후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낙동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 때 북한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온 이유가 바로 우리나라 내부에 북한군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전쟁 후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의 관계자를 살해하였는데, 양산읍 내에서도 옛 양산군청 앞 목화창고 3곳에 이들은 집어넣어 인적이 드문 새벽에 이들은 동면 사배고개, 호포 야산, 교리 춘추원 뒷산 등지에서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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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양산군청 앞 목화창고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지만, 창고에 갇혔던 인원을 생각한다면 수백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국군 23연대(연대장 김종원)는 양산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물금, 상북, 하북 일대의 공산당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청소하였다. 토벌대는 토벌한 빨치산들은 잡아 현재 양산문화원 앞쪽의 목화창고 쪽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공산당원이었다기보다는,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 국민보도연맹을 가입하는 것은 곧 식량을 얻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직업을 보장해준다는 경찰의 거짓 연설을 믿고 빚까지 얻어가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지역 주민들은 이념의 짙은 색채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단지 자기네 가족들을 먹여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이다. 그만큼 좌익운동과 관계없는 다수의 지역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에 등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산읍성 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은 양산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남아있고, 그러한 기억이 언제 구전에서 사라질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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