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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웅천 향교지 1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53
한자 鎭海熊川鄕校址-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산32-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양화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915년연표보기 - 웅천 향교 폐지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1999년연표보기
소재지 진해 웅천 향교지 1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산 32-1 지도보기
성격 교육기관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산32-1 일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학 교육 기관 터.

[개설]

향교는 중등정도의 지방관학으로 지방의 양반 자제 교육 및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에 대한 향사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지방 문화의 향상 및 사풍 진작 등 사회 교육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적극적인 진흥책을 실시한 결과 전국의 부·목·군·현에 향교가 설치되고 이후 크게 융성하였다. 그러나 중기 이후 서원의 발흥과 병란으로 인한 소실 및 재정의 곤란 등으로 쇠퇴하게 된다. 후기에 와서 향교는 이미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제향기관으로 전락하였고, 사학인 서원이 향교를 대신하여 교육기관으로 기능하였다.

향교의 구조는 성균관을 모방하여 문묘·명륜당·동서양제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은 90명, 도호부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규정되어 있고 입학자격은 양반의 자제나 향리로서 16세 이상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예외적으로 16세 이하의 동몽은 정원에 관계없이 입학을 허락하도록 규정했다.

교과로는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제사(諸史) 등이 사용되었고, 성균관, 4부 학당 등과 같이 개인별로 강을 통해 지도하였다.

[변천]

웅천 향교는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서 그 위치를 ‘在縣北一里’로 기록하였고, 관원으로서 훈도 1명을 배치하고 있다고 전한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은 성종 대에 편찬된 『동국 여지 승람』을 증보하여 간행한 것이므로, 향교는 그 이전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32년 간행된 『웅천 읍지』에서는 ‘文廟在縣西一里’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위치로 보아서는 원래 향교의 북부동 관정부락에 소재하였고 이후 관정부락 서쪽으로 이전한 것 같다.

이전 연대는 기록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야은 신태우 유고의 양사제에 관한 기사에 교관[향교]에 서적을 두고 교관의 동쪽에 양사제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웅천향교의 일주문이었던 불곡사[현 성산구 대방동] 일주문의 용두에 조각된 연화가 조선 말기의 것으로 보이므로, 향교의 이전 시점은 조선 시대 말로 추정된다.

[위치]

유적의 서쪽으로 천자봉[502m]이, 북쪽과 동쪽으로는 시루봉-봉동산-학산이 에워싸고 있는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유적의 서쪽에는 동천이 관류하면서 남해로 유입된다.

웅천 향교지 1은 봉동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사면 말단부와 그 평탄면 일원에 해당한다. 웅천 읍성에서 정북방향으로 백일마을 가는 길을 따라 500m 쯤 가다보면 관정보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웅천천을 지나 약 500m 소로를 따라 오르면 남서향으로 뻗어 내린 구릉이 있는데 이 일대가 향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남쪽에 웅천 향교지 2가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웅천빙고지, 북부동 토기산포지, 웅천 읍성, 진해 사직단지 등이 분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0년대 후반 정부차원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발간하여 문화유적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하고자 하는 연차적인 사업이 추진되었따. 이에 웅천 향교지 1은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서 1998년~1999년에 수행한 진해시[2010년 7월 1일 창원시로 통합됨에 따라 진해구로 변경됨] 지표조사보고서에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현황]

웅천 향교는 1915년에 현이 폐지되면서 폐교되어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일주문은 1943년 불곡사로 옮겨와 복원되었다. 향교 철폐 이후 향교의 위패는 현재 북부동 서쪽 동산에 매혼되어 있으며 명륜당의 현판은 주자 영정각에 보관되어 있다.

유적은 임야 혹은 계단식 논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 일대에서 건물지와 관계있는 석물, 석축, 기와편이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현재 창원 지역에서 확인되는 조선 시대 관학 교육 기관의 흔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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