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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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남석광(南錫光)[1881~1952]은 1906년 3월 남석우, 남석인 등과 함께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 의병장 최세윤이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자 청송으로 귀향하여 서종락부대에 참여하였다. 1910년 고와실전투에서 패한 뒤, 각처를 전전하며 은신 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박(而珀). 188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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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남석우(南錫祐)[1871~1933]는 1906년 3월 산남의진에 참여하였으며, 1908년 2월경 편성된 남석구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여(德汝). 1871년 9월 9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중기리 327번지에서 아버지 남성하(南成夏)와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 사이에서 4남 3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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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남석인(南錫仁)[1878~1907]은 1896년 3월 청송의진에 참여하였고, 1906년에는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청송 지역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우팔(禹八), 이명은 남우팔(南又八). 1878년(고종 18)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도평리(道坪里)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의병이 전국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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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남석태(南錫台)[1879~1961]는 1896년 경상북도 영천 신녕의 화산의진(華山義陣)과 1906년 3월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 의병장 최세윤이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자 청송으로 귀향하여 서종락부대에 참여하였다. 1910년 청송 고와실전투 패전 후 은신 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본관은 영양(英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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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남승하(南昇夏)[1872~1907]는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과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체포된 뒤 귀향하였다가, 1907년 4월 정용기가 재기하자 청송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우성(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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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배연집(裵淵集)[1878~1953]은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장영수위(將營守衛)를 역임하였으며, 1908년 2월부터 서종락(徐鍾洛)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원서(元序), 이명은 배연집(裵淵楫) 혹은 배상언(裵尙彦). 1878년 5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하속리 925번지에서 아버지 배선화(裵善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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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서종락(徐鍾洛)[1874~1940]은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청송 지역의 소모(召募)를 담당하였으며, 창의(倡義) 이후에는 1차 산남의진의 후봉장(後鋒將)에 이어 선봉장(先鋒將)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에는 청송 지역 유격대를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제3대 대장 최세윤(崔世允)이 지역 분대를 중심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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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신필호(申弼鎬)[1834~1900]는 1896년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이 창의(倡義)하는 과정에서 청송향교(靑松鄕校)의 교장(校長)으로서 향교의 향원(鄕員)을 소집하여 향회(鄕會)를 개최하는 등 창의를 지원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은수(殷叟), 호는 만음(晩陰). 1834년 청송군 현서면 복리[지금의 안덕면 복리]에서 아버지 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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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우영조(禹永朝)[1870~1963]는 1906년 3월 결성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진보 지역의 소모(召募)를 담당하였다. 1907년 10월 9일 입암전투(立巖戰鬪) 이후, 서종락(徐鍾洛)과 함께 청송 지역 유격대를 맡아 활동하였다. 제3대 대장 최세윤(崔世允)이 지역 분대를 중심으로 한 유격전을 구상하자 청송동부진을 맡아서 불굴의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