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중앙공원에 있는 조선 전기의 누각. 1442년(세종 24) 경주에 있던 「태조 영정」이 충주의 동루에 잠시 봉안되었는데, 누각이 좁고 기울어져 충주목사 김중성(金仲誠)이 “오늘날 어용(御容)이 잠깐 멈추신 것은 참으로 이 고을이 만나기 어려운 영광이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어야 할 것이다”라며 경영루를 지었다....
-
기원 전후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역사와 문화.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70여 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각각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이란 이름의 소국으로 등장하여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사회는...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제주(濟州).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탐라국왕 고자견(高自堅)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윤(開城尹) 고호(高灝)이다. 아버지는 개국원종공신으로 병마절제사를 지낸 고영수(高永壽)이며, 어머니는 개국원종공신으로 찬성사를 지낸 권현(權鉉)의 딸이다. 고려(高呂)는 1380년(우왕 6) 8월 왜구가 배 500여 척의 규모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침입...
-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시 역사. 충주란 고을 이름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주·부·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중원부(中原府)를 고쳐 부르면서 나타났다. 충주란 명칭은 이 지역 인사들이 태봉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우익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
이자성, 이당을 시조로 하고 이극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신라 내물왕 대에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한다. 이자성은 원래 칠원(현 경상남도 함안)을 봉토로 갖고 있던 칠원백이었으나 통일신라가 망한 후에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불복하였으므로 왕건이 이자성의 신분을 낮추어 회안의 호장으로 삼았다. 그 후 고...
-
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지명. 국원성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확보한 거점 지역인 오늘날 충주 지역에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한 후 진흥왕 대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경덕왕 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에 의해 충주라는 명칭으로 변...
-
유삼재를 시조로 하고 유한찬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기계유씨는 신라 때 제6관등 아찬 유삼재(兪三宰)를 시조로 한다. 유삼재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통일신라가 망한 후에도 고려에 불복하므로 태조 왕건이 유삼재의 신분을 낮추어 기계(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호장(戶長)을 삼았다. 이후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고, 후대로 내...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기신 명부. 조선시대 태조 대부터 명종 대까지의 기신(耆臣: 70세 이상의 퇴직 고관)들의 명단과 일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파악하고자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하여 세운 기로소에서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서문과 발문은 권근(權近)[1352~1409], 홍경모(洪敬謨...
-
고려 후기에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할아버지는 첨의중찬을 지낸 상락공 김방경(金方慶), 증조할아버지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김순(金恂), 할아버지는 첨의정승을 지낸 상락후 김영후(金永煦),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김천(金蕆)이다. 슬하에 김승(金陞), 김육(金陸) 2남을 두었고, 손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
-
풍덕마을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한다. 그러던 중 15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인대군의 후손인 이덕량(李德樑)이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덕량[1576~1651]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 이름은 덕명이었다....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승려. 속명은 한찬영(韓粲英).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庵)·혜월원명(慧月圓明)·지감원명(智鑑圓明). 아버지는 사복직장에 재직했던 한적이고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대지국사는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화상 보우를 은사로 삭발하고 법을 받았다. 승과에 응시한 23세 전까지 보우에게 5년, 정혜국...
-
가섭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온수골로 내려와 마제와 신석을 지난 다음 요도천으로 합류한다. 그러므로 마수리의 한가운데를 시내가 흘러간다. 마수리는 이 하천 양쪽에 생긴 논과 밭을 근거지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는 마수리의 중심 마을은 마제이다. 마제는 이 하천의 중하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제라는 동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
-
입향조 이덕량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이름은 덕명(德明)이라 했으며, 어려서는 현덕(玄德)이라 불렀다가 다시 덕량으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의 9세손이다. 만년에 벼슬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풍덕의 동북쪽 사락리 산 60의 엄동 황금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승려. 속명은 이현휘(李玄暉). 본관은 남원(南原), 시호는 법경(法鏡). 당나라 출신 귀화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덕순(李德順), 어머니는 부씨이다. 법경대사는 879년(헌강왕 5) 현 전라북도 남원에서 육두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동군 영각산사의 심광대사에게서 불법을 배운 뒤 무염화상의 문하에서 선법을 공부했다. 89...
-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토사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941년(태조 24)에 입적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보물 제17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는 정토사터에 전하고...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승려.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보각국사는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 아버지 조숙령의 임지인 용주(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입적 승려를 추모하는 묘탑 형태의 조형물. 부도는 고승이 입적한 후 유체를 풍장(風葬) 또는 다비하고 나온 유골이나 사리를 수습하여 봉안하기 위한 기념적인 조형물이다. 부도는 목재·석재·벽돌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는 대부분 석재로만 건립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석조 부도라고 한다. 석조 부도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고승의 유골...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불교의 예배 대상을 조성한 조각상. 불상(佛像)이란 불교의 교리에 의한 예배 대상을 석재나 금속 또는 흙이나 나무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하여 조성한 조각상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로는 붓다 즉, 여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하나, 넓은 의미로 보살상·천왕상·명왕상·나한상 등 불교의 모든 예배의 대상을 포함한다. 이들은 재질에 따라 석불·마애불·금동불·철...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사찰의 유지(遺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충주 지역에 있던 사찰은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 그 사찰 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절터만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절터가 있으며 그곳에서 나오는 명문의 와편을 통하여...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화원(花園). 할아버지는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된 석양선(石良善)이고, 할머니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모인 최씨(崔氏)이며, 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석천을(石天乙)이다. 형은 조선 건국 후 한성판윤을 지낸 석수명(石壽明)이다. 형은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다. 석여명은 고려 후기인...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같은 성과 같은 본관을 갖는 세거 성씨.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이전 고대국가에서는 성씨는 왕족과 극히 일부 중앙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후삼국시대 성주, 장군, 촌주 등의 신분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지방 귀족 이...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있는 온천. 수안보온천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자연적으로 용출된 온천으로서 약 3만 년 전부터 솟아 오른 천연 온천수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청구도(靑邱圖)』 등 30여 종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온천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있는 고려 후기 부도. 억정사지(億政寺址)는 신만리 작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규모가 컸던 사찰로 전하고 있다. 또한 우왕, 공양왕 등 여러 국왕들로부터 존경받은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1328~1390]이 하산한 사찰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건국 직전 입적한 대지국사 찬영을...
-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태조 왕건 후비. 본관은 충주(忠州). 아버지는 충주 지역 호족으로 내사령을 지낸 유긍달(劉兢達)이다. 고려를 개국한 이후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과 혼인 관계를 통하여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이런 이유로 충주 지역 호족의 딸이었던 신명순성태후는 918년(태조 1) 태조 왕건의 제3비가 되었다. 신명순성태후는 태조 왕건과의 사이에...
-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盧堂) 또는 허강(虛江). 할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侯) 심연(沈淵)이며,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심용(沈龍)이다. 아들이 일곱 명으로 심인봉(沈仁鳳)·심의귀(沈義龜)·심도생(沈道生)·심징(沈澄)·심온(沈溫)·심종(沈淙)·심정이다. 이 중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가 되었으며, 심종...
-
권행을 시조로 하고 권천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말 고창(현 안동)의 별장(別將)으로 있다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웠다. 권행의 성씨는 본래 김씨였으나 삼한벽상공신에 오르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은 이후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권씨는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자...
-
허선문을 시조로 하고 허초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양천허씨는 허선문(許宣文)을 시조로 한다. 허선문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공암현(현 김포시)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어 거부가 된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식량과 마필을 지원하여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공을 세워 공암촌주에 봉해지면서 공암현을...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에서 삼방리에 있는 어래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어래산 전설」은 주덕읍 삼청리에 있는 해발 387m의 어래산에 깃든 지명유래담이다. 어래산이라는 명칭은 배극렴이 이 산에 은거를 하고 있었는데, 이태조가 배극렴을 찾아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는데, 당시 주덕읍 삼...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주(坡州). 염상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2등공신에 봉해졌으며, 940년(태조23)에는 재상직에 있으면서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자 왕무(王武)[훗날의 혜종(惠宗)]를 도와 정무를 보살폈고 왕건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으며 왕건이 죽자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 해적의 침입 사건. 왜구는 일본 남북조의 혼란기에 생겨난 집단으로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떼를 지어 수시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연안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등 만행을 일삼았던 해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왜구는 고려시대 충정왕(忠定王)[1349~1351] 때부터 우왕(禑王)[1375~1388]...
-
고려시대 몽고군의 충주성 공격 때 충주 지역 사람들이 월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 1256년(고종 43년) 4월 29일에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은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신사로 올라갔다. 몽고군이 이들을 추격하는데,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과 번개와 벼락이 함께 들이쳤다. 이에 몽고군은 신이 난민을 돕는 것이라 여기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유교는 공자(孔子) 및 맹자, 증자 등 유가(儒家)의 정치 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충주에서 유교 문화가 성립,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은 신라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강수(强首)이다. 김생(金生)은 명필로도 유명...
-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유권열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제3왕후 신명순성왕태후의 친가인 충주유씨 집안 출신으로 태조 즉위 초 광평시랑(廣評侍郞)이 되었다. 당시 궁예(弓裔)의 시중직을 역임했던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하여 나주로 떠나게 되었다. 구진이 사양하려 하자 유권열은 “상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하는 것...
-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호족. 본관은 충주(忠州). 딸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이다. 유긍달은 통일신라 말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다. 900년(효공왕 4)에 왕건이 궁예(弓裔)의 부장으로서 지금의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청길(淸吉), 신훤(莘萱)의 세력을 평정할 때 유긍달과 인연을 맺...
-
조선 전기 충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산(德山). 호는 영재(靈齋). 아버지는 참지의정부사 이조(李慥)이다. 이익박은 황희(黃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22년(세종 4)에 홍천현감(洪川縣監)을 거쳐 1427년에 충주판관이 되었다.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의 아내가 친정으로 가는 길에 충주를 지나는데 마을 사람 백운흥 등이 작당하여 그 종인(從人)들을...
-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
이도를 시조로 하고 이신효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의이씨의 시조 이도(李棹)의 본래 이름은 이치(李齒)다. 이도는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범람하는 금강을 건너려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왕건으로부터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또한 삼한개국공신에 오르고 전의후에 봉해지면서 전의(현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수견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지만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계보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대군(정비의 소생)과 군(후궁의 소생)을 파조로...
-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희열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지만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계보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대군(정비의 소생)과 군(후궁의 소생)을 파조로...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집성촌. 제내리(堤內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한 법정리이다. 이전에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죽안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제내리다. 제내리는 풍덕·성동·대촌 3개의 행정동(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주이씨 제내리 집성촌은 1590년대 중반 조선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의 9세손 이...
-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건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지만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계보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대군(정비의 소생)과 군(후궁의 소생)을 파조로...
-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호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지만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계보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0여 파로 거의 대군(정비의 소생)과 군(후궁의 소생)을 파조로...
-
중앙탑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옛 백제·고구려 지역에서 등장하는 지방 세력의 반발과 반신라적 민심의 대두를 잠재우고 국가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호국적인 불교의 힘을 빌려 세운 비보적 의미를 지닌 원탑이다. 중앙탑이 충주에 건립된 이유는 그 위치가 신라 영토의 중앙에 해당되어 건탑의 목적을 널리 떨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도 다음가는 소경(小京)이라는...
-
995년(성종 14)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전국을 통일된 국가체제로 다잡기 위하여 지방 행정구역에 대한 일대 개편을 단행하지만 중앙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목민관을 파견하지는 못하였다. 이 후 983년(성종 2) 12목이 설치되어 목사가 파견된 데 이어, 995년 7월에 중앙정부에 의한 실질적인 지방통치를 시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려...
-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 충주유씨 등 호족이 충주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관부(官府). 도속이관(道俗二官)의 기록은 보물 제17호로 지정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음기에 나타난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주인공인 법경대사는 당나라에 가서 구봉산(九峯山) 도건대사(道乾大師)에게 심요(心要)를 받고 10년 동안 각지를 두루 편력하다 924년(태조 7) 46세로 귀국하...
-
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시대 금석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에는 충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중주(中州)’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에는 중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민간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
-
고려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호보(浩甫). 호군(護軍) 최녹원(崔祿元)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정벌한 공으로 세조 묘정에 배향된 최윤덕(崔潤德)이 아들이며, 그 외에도 세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의 전공으로 공민왕 때 충용위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공총랑(典工摠郞)이 되었다. 1385년(우왕 11) 충...
-
고려 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재(直哉). 고려 태조를 도운 공신 최준옹(崔俊邕)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문하시랑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中書門下平章事) 최석(崔奭)이다. 최유청은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스스로 유자(儒者)는 고학(古學)을 배운 후에 벼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문을 닫고 책 읽기에 열중하며 벼슬을 사양했다. 뒤에 추천...
-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고려 전기 고승 법경대사의 부도탑비. 법경대사는 879년(헌강왕 5)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법을 배웠고, 20세에 불가에 입문하였다. 906년에는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다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이 국사로 대우하며 정토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941년(태조 24) 63세로 입적하자 태조가 시...
-
고려 후기에 제기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으로의 수도 이전 주장. 고려 후기 왜구가 무차별적으로 침입해 오는 상황에서 수도인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도참설(圖讖說)이 횡행하였다. 이에 충주(忠州)는 내륙의 오지라는 점에서 공민왕 때부터 천도지로 자주 거론되었다.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충주의 지정학적 조건은 천도지로 주목되기에 충분하였다. 1357년(공민왕 6) 승려 보우(...
-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지에 있는 조선 전기 보각국사 석재 부도.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일대에 있는 사지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목할 만한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그동안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
-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지에 있는 사자를 대석으로 삼은 조선 전기 사각석등.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일대에 있는 사지로, 조선 초기 건립된 주목할 만한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그동안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고려시대 승려 보각국사의 탑비.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392년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
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 충주시는 중부 내륙 광역권의 거점 도시로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풍부한 용수로 기업하기 좋은 산업 기반이 구축된 도시이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전국 교통망의 중심이며,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충주호와 월악산, 수안보온천·앙성온천·문강온천이 있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이다.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
-
어중익을 시조로 하고 어백평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성씨. 충주어씨는 고려 초 평장사를 지낸 어중익(魚重翼)을 시조로 한다. 어중익은 본래 지씨였는데 겨드랑이에 있던 세 개의 비늘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이 어씨(魚氏)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어중익 이후 계보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고려 말 성균진사를 지내면서 가세를 일으킨 어승진을 중시조 겸 1대조...
-
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성씨. 충주유씨는 유긍달(劉兢達)을 시조로 한다. 유긍달은 충주의 호족 세력으로 918년(태조 1) 딸 신명순성태후가 고려 태조 왕건의 제3왕비가 됨으로써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후손들이 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 우리나라 평상복은 민족적·지리적으로 동북에 숙신족, 서북쪽에 선비족과 돌궐족, 서쪽에 한족 등과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북방 기마 민족의 옷에 영향을 받아 추위와 유목 생활에 알맞은 소매와 바지폭이 좁고, 저고리와 바지 분리형 양식이 자리 잡았다. 때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큰 변화를 가져온 적도 있지만 저고리,...
-
신라 후기부터 고려 전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회 변동을 주도하며 존재한 지방 세력. 신라 하대에는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방 세력이 대두하였다. 호족은 몇 가지의 부류로 구분된다.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한 경우, 지방의 토착세력이던 촌주(村主)들이 성장한 경우, 청해진의 장보고...
-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승려. 홍법국사의 생전 활동 모습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가 전해지고 있어 비문의 내용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그 생애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비문마저도 마멸이 심하여 전문의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판독이 가능한 부분만을 토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