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지(成之). 증조부는 김화(金華), 할아버지는 김소(金遡)이다. 친아버지는 문경공 김예몽(金禮夢)으로, 후사가 없는 참의공 김의몽(金義夢)의 양자로 들어갔다. 형은 김덕원(金德源)이다. 정계소(鄭繼紹)의 딸 증정부인 서산정씨 사이에서 김철문(金綴文), 김말문(金末文), 김내문(金乃文) 등 8남을 두었다. 아들 8명...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