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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386
한자 趙顯命
영어공식명칭 Jo Hyeonmyeong
이칭/별칭 치회(稚晦),시회(時晦),귀록(歸鹿),녹옹(鹿翁),충효(忠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조현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조현명 문과 급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28년 - 분무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군에 책봉
활동 시기/일시 1730년 - 조현명 경상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34년 - 조현명 공조참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40년 - 조현명 우의정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50년 - 조현명 영의정 역임
몰년 시기/일시 1752년 4월연표보기 - 조현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52년 - 조현명 충효(忠孝)라는 시호를 받음
출생지 해등촌면 건동 - 서울특별시 도봉구
부임|활동지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지도보기
묘소|단소 조현명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풍양(豊壤)
대표 관직 경상도관찰사|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조현명(趙顯命)[1691~1752]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또는 녹옹(鹿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형(趙珩)이고,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다. 아버지는 도사 조인수(趙仁壽)이고,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윤지원(尹志源)의 딸 칠원윤씨(漆原尹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도정 김성유(金聖游)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좌의정을 지낸 조문명(趙文命)이 형이다.

[활동 사항]

조현명은 1690년(숙종 16) 해등촌면 건동(乾洞)[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태어났다.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19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영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하며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한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조현명은 1724년 영조(英祖)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영남의 남인들을 무마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힘을 쏟았다. 이때 대구부 선화당(宣化堂)의 상량문을 지었고, 간성당(干城堂)에 제영시를 남겼다. 1732년 경상도관찰사에서 파직된 뒤에도 영남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서원에 서적 하사, 숙유(宿儒)의 등용, 정문(旌門)과 명현(名賢)들의 분묘 수리 등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현명은 1734년 공조참판을 거쳐 어영대장, 부제학, 이조판서·병조판서·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우의정에 발탁되어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였고, 1750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1751년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752년 4월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현명의 저술로는 『귀록집(歸鹿集)』 20권 20책이 있고, 1755년(영조 31)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인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조현명의 시조 1수가 전한다.

[묘소]

조현명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현명은 1752년(영조 28) 충효(忠孝)라는 시호로 받았다. 영조가 직접 제문을 음식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고,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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