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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37
한자 金錫亨
영어공식명칭 Kim Seokh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11월 7일연표보기 - 김석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9년 1월 13일 - 김석형 통사 간행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3월 - 김석형 학사 학위 수여
활동 시기/일시 1956년 1월 - 김석형 역사연구소 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김석형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 김일성대학의 대표로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김석형 사회과학원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8월 - 김석형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5차 국제동방학자대회에 사회과학원 대표단장으로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김석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가민족위원회 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김석형 마르크스·레닌주의방송대학 부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11월연표보기 - 김석형 국기훈장 제1급 수여
활동 시기/일시 1973년 2월 - 김석형 김일성대학 부총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3년 11월 - 김석형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김석형 김일성 훈장 수여
몰년 시기/일시 1996년 11월 26일연표보기 - 김석형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단소 애국열사릉 - 북한 평양직할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성격 역사학자
성별 남성
대표 관직|경력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

[정의]

대구 출신의 월북 역사학자.

[개설]

김석형(金錫亨)[1915~1996]은 북한 사회의 역사상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고 북한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대구 출신의 학자이다.

[가계]

김석형의 아버지는 김의균(金宜均)이고, 어머니는 이원경이다. 5남 6녀 중 셋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석형은 1915년 11월 1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1940년에 본과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 양정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반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광복이 될 때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10월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46년 8월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가 되었다.

1949년 1월 13일 북한 교육상이 통사 간행을 위하여 편찬위원회를 구성할 때 김석형은 상임위원이 되어 봉건사분과위원회를 운영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서울에서 『조선왕조실록』 확보 활동을 벌였고, 1953년 7월 북한 내각에서 결정된 국가 학위 수여에 관한 새 규정에 따라 1955년 3월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1월 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고, 10월에 루마니아를 방문하였으며 김일성대학의 대표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 참가하였다. 1958년에는 사회과학원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역사연구소 소장을 겸하였다. 1961년 9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가민족위원회 연차회의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로부터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석형은 1960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5차 국제동방학자대회에 사회과학원 대표단장으로 참석하였고, 1963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였다.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2년 마르크스·레닌주의방송대학 부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이 되었다. 1962년 11월에는 북한 정부로부터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 1982년 2월 제7기 대의원, 1982년 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김석형은 1973년 2월 김일성대학 부총장이 되었고, 11월에는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이 되어 북한 역사학계를 이끌었다. 1989년 5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남북회담 대표로 남북한 역사학자 회담을 제안하는 등 대남 사업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이 되었고, 1992년 4월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이후 사회과학원 원장,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상무위원, 최고인민위원회 상설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94년과 1995년에는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여 단군·고조선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서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6년 11월 26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석형의 저술로는 『이조병제사』[인민군출판사, 1954]·『역주 동국병감』[국립출판사, 1955]·『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과학원출판사, 1957]·『초기 조일관계 연구』[1966] 등이 있으며, 『조선통사』[1956]의 고려 후기 부분을 집필하였다.

김석형은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북한 편사학의 기초가 정립되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쳐 『조선전사』의 편찬으로 집대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뒤집는 삼한·삼국의 일본 열도 분국설을 1963년에 제기하여 고대 한일 관계사를 재고하게 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북구주(北九州)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전역에 걸쳐 삼국의 분국을 형성하였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묘소]

김석형의 묘소는 북한 평양직할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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