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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491
한자 建設業
영어공식명칭 Construction Industry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광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토목, 건축 기타 이와 관련된 공사를 시행하는 산업.

[개설]

대구 지역 근대 건설의 특징은 전통 기술의 개량이나 접목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술과 자재 및 모양이었다. 대구 최초의 근대 건물은 1901년 대신동 계성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3층 크기의 선교사 아담스의 주택이다. 공공건축으로서는 1902년 계산성당이 최초이다. 대구에 등장한 최초의 토목공사는 ‘경부선 철도사업’이다. 경부선은 1901년에 시작되었으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04년 경부철도 남부공구 건설 사무소가 대구에 설치되면서부터이다. 또한 1914년 6월 26일 착공한 제1차 상수도 공사는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토목공사로 사업비는 48만 5000원이 투입되었다. 공사 구역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오동의 취수장과 파동의 정수장, 대봉동의 배수지 건설 구간이었다.

[현황]

대구 건설업계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이 떠나면서 공백 상태였지만 귀속재산으로 건설회사를 불하받은 사람들이 겨우 건설업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950년대 건설업은 주로 정부 재정 혹은 미국 원조에 의한 건설이 주류였다. 그 당시 대표적인 건설공사는 1954년부터 1959년 7월에 완공한 가창댐과 다리 공사이며, 시공 회사는 현대건설이 맡았다. 1959년 경북대학교 본관 5층 건물도 대표적인 건물이다.

1966년 7월 17일 동대구역 신축 기공식은 대구 지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대구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사업으로서, 대구에 첫 등장한 고가도로였다. 당시 기술 수준이 낮아 한 차례 낙반 사고도 있었다. 1960년대 또 하나의 대표적인 명물은 경북실내체육관[1984년부터 대구실내체육관으로 개칭]이다. 1966년 9월 7일 착공하여 1971년 4월 준공한 경북실내체육관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대구 시민들의 눈에 비친 고층 빌딩은 대구백화점 건물이다. 1969년 6월 30일 일부 준공된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11층에 연건평 1,988평[약 6,571㎡]의 당시 최고층 건물이었다.

1970년대 중동 붐이 일어났지만 지역 건설업체는 중동 특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1979년 한일산업이 하청으로 필리핀 빌딩 건축에 참여하였으나 큰 부채만 떠안은 채 1982년 철수한 것이 첫 해외 진출한 대구 기업이었다. 1970년대에 기록할 만한 것은 대구시 중구 동신지하상가이다. 동신지하상가는 지하공간을 개발하는 것으로서, 당시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과 교통체증, 과밀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지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토지 효율을 높이는 원론적인 의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대구의 건설업계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건설업체 수는 22개사로 전국 506개사의 4.3%에 불과하였으며, 대기업은 2개사였다. 1983년 9월 1일 발주한 대구시 달서천 하수처리장 건립은 면허를 가진 대구 업체가 전무하여 서울 업체가 맡았으며, 대구염색공단 공동 폐수처리장 건설은 화성산업이 맡았다. 또한 대구은행 본점 건물은 1980년 10월에 시공하여 1981년 9월에 준공한 것으로, 풍산건설과 효성알미늄이 각각 분업 형태로 참여하였다. 철골 시공 면허를 가진 대구 업체가 없어서 서울의 흥화공업이 맡았다.

1980년대 아파트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기존 주택 회사의 외형이 커졌고, 대구 지역 주택업체가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발표된 대구와 경상북도 내 건설업체 도급 순위를 보면 광명건설이 2위, 서한 3위, 청구 5위를 차지하였지만, 1987년 10월 31일에는 청구가 도급 순위 1위가 되었다. 대구 아파트 건설업계는 1980년 초의 극심한 불황이 경쟁력 강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설이나 조경, 사후 서비스, 그리고 설계 아이디어 등에서 대구 건설업체의 비교우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구, 우방, 화성산업, 보성, 영남건설이 수도권 신도시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당시 지역에서 전국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청구, 우방, 보성 등 3대 건설업체는 구조조정을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붕괴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하청업체들도 부도가 나면서 1998년 업체수는 전년도에 비하여 15% 감소하였고, 종사자 수도 38% 감소하며 그 충격이 오래갔다.

2018년 기준으로 주택보급률은 104%이며, 건축허가 면적은 943만 4675㎡로서, 2013년 기준의 571만 9448㎡보다 6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업체 수는 6,795개, 종사자 수는 6만 332명으로, 2013년 기준 사업체 5,708개, 종사자 수 3만 8306명보다 각각 18.4%와 57.5%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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