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67
한자 李鍾勳
이칭/별칭 진호(振浩),정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5년 2월 19일연표보기 - 이종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9월 - 이종훈 동학농민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이종훈 3·1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0년 5월 2일연표보기 - 이종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이종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이종훈 출생지 -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유여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21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고려혁명당 고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이종훈(李鍾勳)[1855~1930]은 1919년 3월 1일 천도교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천도교 계열이 1926년 만주 길림에 결성한 고려혁명당 고문으로 활동했다.

[가계]

이종훈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진호(振浩), 천도교 도호는 정암(正菴)이다. 이우재(李禹載)의 차남이다.

[활동 사항]

이종훈은 1855년 음력 2월 1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38세인 1893년 1월 17일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 6월 2일 최시형이 교수형을 당하자 시체를 수습해 경기도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종훈은 3·1운동 이전부터 천도교 내에서 민중운동의 전개를 모색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서명에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다. 독립선언 직후 체포된 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종훈은 천도교 개혁과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천도교 내 혁신파를 지지하며 1926년 만주 길림에서 결성된 고려혁명당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중국 길림에서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 천도교 혁신파, 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성격을 가진 정당적 단체였다.

이종훈은 1930년 5월 2일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이종훈선생수기』가 있다.

[묘소]

이종훈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21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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