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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D020102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기범

이진말마을은 서울에서 내려오다 충주와 음성, 청주로 갈라지는 길목에 있었으며, 6·25전쟁에서 국군의 최초 승전인 감우재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 가까운 마을로 인민군이 머물기도 하면서 6·25전쟁의 피해가 심했던 마을이다. 특히 생극면 소재지인 신양리병암리는 교통의 요지로 충부와 음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전쟁지구였다. 이진말마을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었고 인민군이 오랫동안 진을 쳤다고 한다. 특히 음성 감우재 전투 때에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있었으므로 일주일 동안 진을 쳤다고 한다.

6·25전쟁 초기 인민군이 생극면 지역으로 올 당시 이진말을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오덕욱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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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야기1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는 날 낮부터 술렁거렸어. 여주군 태평리부터 들어온다고 난리였지. 그때 아버님이 이장을 하고 계셨는데, 저녁을 먹고 있는데 다른 분들이 피하라고 하셨어. 그래서 떡갈참나무가 있는 뒷산에 피신하였지. 땅굴이나 동굴처럼 따로 숨어있던 곳은 없고 나무 밑에 비만 피하였어. 한 9시쯤 차 소리가 들리는데 깜깜한데 불을 켜지 않고 인민군들이 지나갔는데 다행히도 마을에 들어오지는 않고 지나쳐 갔지. 장호원에서부터 이곳을 지나 충주로 들어갔는데. 가는 길에 오생리에서 격전을 했다고 해. 그리고 후퇴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음성으로 들어가서 싸웠는데 그게 감우재 전투였다고 해”

이순복 할아버지(31년생, 77세)는 “그때 의병으로 끌려갈 뻔 했는데 보도연맹에서 의원장(지금으로 따지면 면장) 하시는 분의 도움으로 끌려가지 않았어. 의원장의 형수가 처갓집 뒤에 살았는데, 그분 댁에 숨어 있어서 끌려가지 않았지”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싸이렌이 울고 피난을 가라는 방송이 들렸고. ‘초크병’이라 불리던 마병들이 마을에 들어왔어”라고 하였다.

감우재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을은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의 전쟁 상황과 마을의 피해에 대해서 오덕욱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감우재 전투에서 포격전을 한나절부터 했는데, 마을에서는 소 한 마리 죽고, 집 한 채 절단 났는데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리고 그 전투에서 인민군들이 많이 죽었대. 한국군들에 비해 인원이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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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야기2

그리고 그 당시의 마을 상황에 대해 오덕욱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지나간 뒤에는 저녁마다 인민군 회의를 했다고 해. 그 당시에 행정 보던 사람들은 주로 지방 빨갱이들이었지. 그 때 이 동네 소염 보던 사람(심부름하던 사람)이 이장이 됐는데 이장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아버님은 평소에 잘못한 게 없으셔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 6·25가 끝난 뒤 그 사람들은 도망을 가서 소식을 몰러. 그 사람들도 아주 없이 살아서 평소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았던 것 때문인지 남한테 심하게 했던 것 같어.”라고 하였다.

또한 마을의 최창순 할머니(34년생, 74세)는 인민군들에게 큰 곤혹을 치렀다며 "그 당시에 오빠가 군인으로 가서 지방 빨갱이들이 매일같이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어. 방공호에 아버지를 가둬놓고 때리고 총질을 하면서 무지 괴롭혔지. 그래서 어르신과 다른 형제분들은 매일 도망을 다니는 거여”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진말마을에서도 1·4후퇴 때 피난을 갔는데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오덕욱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청원군 남일면 지북리까지 피난을 갔어. 남의 집에 방 한 칸 얻어서 2주일 정도 살다가 왔지. 마차에 쌀과 이불을 싣고 한나절 정도 떠났던가. 올 때는 마차와 소 다 처분하고 빈 몸으로 돌아왔다구. 피난 갈 때 일주일 걸렸던 것 같어. 내덕동 근방에 방 얻어서 며칠 살다가 남일면에 간 거여”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1·4후퇴 때 마을의 피해에 대해서도 “미군들이 집을 다 태웠어. 초등학교 연병장 꽉 찰 정도로 미군이 많았지. 영국군하고 미국군이 집을 태웠는데 보상도 안 해주고. 인민군이 집에 숨을까 봐 그런 것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 마을 전체가 세 집 빼고 다 탔어. 피난 갔다 오니깐 그때까지 연기가 나고 있었어. 노인들 한 명씩 집에 있던 세 집만 빼고, 빈집들을 다 태운 것 같어. 그래서 광 한 칸에 방을 꾸며서 살았지”라고 하였다.

또한 이순복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마을 사람들이 거의 피난을 나갔다며, “1·4후퇴 때 경북 경산까지 갔었어. 이곳에 있으면 인민군이 죽인다고 정부에서 청년들을 다 데리고 갔었거든. 경산초등학교까지 갔는데 정부에서 해체시켜서 돌아왔어. 돌아올 때 열병이 심해서 죽은 사람도 많고, 아군한테 잡혀서 입대한 사람, 지원병으로 붙잡혀간 사람이 많았지”라고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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