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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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 侵入 |
영어공식명칭 | Invasion of Japanese Raider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고려 후기 왜구가 경상남도 거창 일대에 침입한 사건.
[개설]
왜구란 대략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시 왜구가 자행한 각종 노략질은 일반 민인들의 삶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운(漕運)를 비롯한 행정 체제에도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고려 시대 거창 지역은 삼별초 항쟁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이주한 거제현 주민들이 150여 년을 머물게 함으로써 적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 후기의 일본은 남북조(南北朝)로 정권이 양분되어 있는 내란기에 해당하였다. 중앙 권력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유력한 무사(武士)들이 영지를 더욱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들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 무사들이 속출하였다. 이들 몰락 무사들과 기근을 면치 못하고 있던 쓰시마[對馬島]·이키시마[壹岐島]·마쓰우라[松浦] 등의 영세 농어민들이 해적으로 결합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려의 연안 지역들은 이들의 우선적인 주요 약탈 대상 지역이 되었다. 특히 거창 지역은 거제도 주민들이 우거하게 되어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경과]
왜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 더욱 심했는데 적게는 수십 척에서 많게는 수백 척의 배를 이용해 침입하였다. 그 수가 많을 경우 수천에 달하였다. 왜구의 피해는 남부 해안 지역이 가장 극심하였다. 1350년(충정왕 2)부터 해마다 침입하여 흥무 연간[1368년~1398년]에 많았기 때문에 ‘흥무난(洪武亂)’이라고도 하였다.
특히 거창 지역이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1379년(우왕 5)부터 8년 사이였다. 1379년 함양 지역에 침입한 왜구들은 기병 700과 보병 2천 규모였다. 당시 고려 측 군사 500여 명이 사상당하였다고 하니, 주민들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거창 지역의 피해 사례는 다양한데,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효자 반전(潘腆)은 왜적들이 붙잡아간 아버지를 은덩어리[은정(銀錠)]와 은띠[은대(銀帶)]를 바쳐서야 구출할 수 있었다. 한편, 열녀(烈女) 최씨(崔氏)의 사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함께 구비전승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낭장(郎將) 김순(金洵)의 아내 최씨는 왜구가 겁탈을 하려들자 자결을 하여 그 정조를 지켰으며, 이러한 최씨의 처신을 기려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그 마을을 절부리(節婦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과]
삼별초 항전에 이은 왜구들의 침략으로 1271년(원종 12)에 남해의 큰 섬에 있던 거제도 사람들이 가조현에 들어와 임시로 살게 되면서 가조현이 잠시 없어지고 거제현이 되었다. 거제 사람들은 이후 150여 년간을 거창 지역에 머물렀다. 이 기간 거제현의 속현인 아주현[남하면 아주리 일대]과 송변현[남상면 송변리 일대]도 함께 배치되었다. 또한 오양역이 설치되어 교통상으로도 일정한 변화가 뒤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거제 주민들이 들어온 이후 거창 지역은 인구수가 크게 불어나고 내륙 지역인 거창에 섬 사람들이 이주해 살면서 거창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수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