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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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胃川面 萬歲 運動 |
영어공식명칭 | Wicheonmyeon Manse Un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광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8일 - 위천면 만세 운동 위천 장날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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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위천면사무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511-2 |
성격 | 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정대필|유희탁|정수필|유한탁|이형준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서 1919년 4월 8일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만세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가조면에서 만세 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위천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4월 1일 위천 장날을 기해 대규모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인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었다. 또한 1919년 초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한 것 역시 일본에 대한 민족적인 감정이 끓어오르는 데 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1919년 2월 28일 일본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을 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자극이 되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주로 종교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했다. 민족 대표들은 서울의 태화관에 모여 일본 제국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으며,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되었다. 이 사실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급기야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약 3개월 이상 전국의 각지로 만세 운동은 전파되었고, 지역에서는 일본 경찰과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3·1 만세 운동은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1910년대 무단 통치를 통해 억압적인 식민지 지배를 강화해 오던 일본이 ‘문화 통치’로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1920년대의 항일 운동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노선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과]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거창군에서는 가조면에서 만세 운동이 먼저 일어났고, 가조 장터에서의 만세 운동 소식은 위천면에도 금방 전해졌다. 위천면 장기리에 거주하던 정대필(鄭大弼), 유희탁(劉熺倬)은 정수필(鄭洙弼), 유한탁(劉漢倬), 이형준(李衡俊)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4월 8일 위천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식을 비밀리에 알렸다. 4월 8일 장날 정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든 가운데 시위 주동자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3·1 만세 운동은 주로 장터나 학교에서 발생했는데,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의 감격에 감동을 받은 시위대의 물결은 헌병 주재소 앞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여 돌을 던지면서 "우리는 독립국이니 일본인은 물러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는 등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해 모여든 군중을 해산시켰다.
[결과]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앞장섰던 정대필과 유희탁은 거창 헌병 분대로 압송이 되었으며, 각각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할 때만 해도 3·1 운동은 비폭력의 성격이었으나 이후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적인 저항을 포함하는 항일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거창군 위천면에서의 3·1 운동 역시 단순하게 독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일본 헌병과 충돌했다. 이 만세 운동은 지역 사회 속에서 학력이나 성별의 차이, 경제적 처지를 뛰어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합한 항일 운동이다.
한편, 위천면사무소 일대가 옛날 장터였음을 위천면 사무소와 시장 상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유희탁 공적 조서」·「정대필 공적 조서」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