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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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慎守彛 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Stone Monument of Shin Sooy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익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88년 - 신수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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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68년 - 신수이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898년 - 신수이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신수이 신도비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뒷산 |
성격 | 비|신도비 |
관련 인물 | 정희량(鄭希亮)|신권(愼權) |
재질 | 화강암[귀부와 이수]|대리석[비신]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52㎝[높이]|61㎝[너비]|16㎝[두께]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뒷산에 있는 조선 후기의 학자 황고 신수이를 기리는 신도비.
[개설]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1688~1768]는 영조 대의 학자로 거창 신씨 가문의 후손이다. 요수(樂水) 신권(愼權)의 5세손으로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닦았고, 여덟 권의 문집을 남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戊申亂] 때 안핵사에게 난에 단순 가담한 지방민들의 무고함을 알려 이들을 구제하였다. 사후 구연 서원(龜淵 書院)에 배향하였다. 신수이 신도비는 이런 신수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신도비이다.
[건립 경위]
신수이의 증손 신필영(愼必寧)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 2) 10월에 신수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마리 파출소가 있는 진산 삼거리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직진한다. 영승 마을에서 영승교를 건너 마을 북쪽 영승재 뒷산에 신수이 신도비가 있다.
[형태]
신수이 신도비는 귀부와 이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체 크기는 270㎝이다.
[금석문]
비신의 상단부에 ‘황고 신선생 신도비명(黃皐愼先生神道碑銘)’이라 전서로 새기고, 비문은 비신 사면에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현황]
신수이 신도비는 묘소에서 5m 정도 왼쪽으로 떨어져 있다. 원래는 묘도 입구에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 때 길을 넓히면서 이전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