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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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사신원마을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계산리 사신원(四信院)마을은 옛날 공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사신들이 묵었던 숙박 시설인 사신원이 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사신원은 무장현에 있던 원(院)으로 사신들이 이곳에서 머물며 인천강[주진천]을 건너다녔다고 한다. 「할매바위 오은굴과 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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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고창군청에서 고창군의 모든 행정 자료를 집대성하여 간행한 군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조선 시대의 행정 단위였던 고창현[현 고창읍], 무장현[현 무장면], 흥덕현[현 흥덕면]이 고창군으로 통폐합된 이후 고창군의 전체적인 현황과 역사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할 필요성에 따라 1992년 최충일 군수의 주도 하에 집대성한 군지이다. 『고창군지』의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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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작가 이성수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2014년 출간한 소설. 『구수내와 개갑장터의 들꽃』은 2014년 고창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으로 출간된 창작 소설이다. 그동안 묻히고 폄훼되고 왜곡되었던 고창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구성하여 전개하였고,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작가의 상상으로, 당시의 사회와 시대 상황을 재현해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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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간행된 읍지. 기록에 의하면 『무장읍지(茂長邑誌)』는 1544년(중종 39) 무장현감 유희춘(柳希春)이 최초로 간행했다고 하나 판종은 알 수 없다. 이후 1636년(인조 14)에 심제(沈𪗆)가 두 번째 『무장읍지』를 간행했으나 역시 판종을 알 수 없다. 세 번째로 1741년(영조 17)에 역시 무장현감 정권(鄭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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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향교에서 1967년 편찬한 무장현 지역의 유림 연원록. 『송사유림연원록(松沙儒林淵源錄)』은 우리나라 유학의 연원과 고창 지역 여러 문인들의 성명과 자·호·생년·본관·행적 등을 간단히 붙여서 편찬한 책이다. 송사(松沙)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개명된 무송(茂松縣)과 장사(長沙縣) 두 지명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인 1417년(태종 17) 두 현을 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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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정익환(鄭益煥)이 중심이 되어 조선 시대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지역에 거주한 충신·효자·열부에 관한 기록과 시문을 모은 문집. 『송사의적(松沙懿蹟)』은 무장현 관내 출신 인물 중 충신·효자·열부들의 표창을 건의한 글과 명사(名士)들이 지은 시문을 모은 문집으로서, 당시 무장향교의 전교(典校)를 맡고 있던 정익환(鄭益煥)이 중심이 되어 글을 수집한 뒤 간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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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실학자. 강후진(康候晋)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이재(頥齋) 황윤석(黃胤錫) 등과 더불어 호남 실학자로 평가된다. 한국의 상고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특이한 관점과 식견을 지녔으며, 문헌을 널리 읽고 유적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록한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순(子順)·순보(順甫), 호는 태평산인(太平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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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에 있었던 해상 포구. 검당포(黔堂浦)는 조선 시대에 농도가 진한 소금물[염탕수]을 큰 솥에 넣고 불을 지펴 다려 만드는 화염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검당포의 지명 유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선운사를 창건한 검당선사 또는 화염을 굽는 벌막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검당]와 관련된다는 설이 있다. 전언에 의하면 1400여 년 전 검당선사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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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관련 포구. 조선 시대 고리포는 봉화를 올렸던 고리포 봉수대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며 봉군들이 머물렀던 마을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여m 지점의 안산[120m]의 정상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리포의 봉수가 무장현의 서쪽 20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구시포의 남서쪽 약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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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경우, 봉수대는 고창현[현 고창읍]과 흥덕현[현 흥덕면]에는 없었고, 무장현[현 무장면]에만 두 곳이 설치되었다. 그 이유는 무장현이 바닷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봉수조를 보면 “고리포봉수재현서이십리남응영광군홍농산북응소응포(古里浦烽燧在縣西二十里南應靈光郡弘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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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부터 근대 개항기까지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소재로 전해온 문서. 문서란 경우에 따라서 서책·서적을 뜻하기도 하였고, 추안(推案)·국안(鞫案) 등 재판 관계의 신문·진술 기록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과 개인 간에 토지·노비·가옥의 매매, 재산의 상속, 전곡(錢穀)의 차용 시에 주고받는 글은 주로 문권(文券)·문계(文契)·문기(文記) 등을 썼으나, 흔히 땅문서·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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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두암리에 있는 녹색 농촌 체험 마을. 고창군의 서남에 위치한 공음면은 백제 시대에 상로현(上老縣)에 속해 있었으며, 신라 시대에는 상로현을 개칭한 장사현(長沙縣)에 속하였다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이 병합되어 무장현으로 예속되었다. 그 후 1914년 와공면과 동음치면이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공음(孔音)으로 개칭되었다. 고사리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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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산수리와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에 걸쳐 있는 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고창현, 흥덕현, 무장현을 합하여서 고창군이 되었다. 고산은 무장현에서 제일 높다고 하여 고산이라 부르고 있다. 고산이 영산강의 분수령인 고창 들녘에 높이 솟아 주변의 조망대 역할을 한다. 고산은 덕유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높이는 낮지만 평야지로 형성된 고창 지역에서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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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와 성송면 무송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백제 시대 석성. 고창군 대산면과 성송면 일원은 백제 시대 송미지현[현 성송면, 대산면, 무장면 일원]에 속하다가 무송현으로 개칭되었고, 1417년(태종 17) 무송현이 장사현과 병합하면서 무장현이 되었다. 고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 고적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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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석축 읍성 및 관아 건물. 1991년 2월 26일 사적 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축조한 건물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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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전라북도 고창군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이며, 고인돌·판소리·농악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고창갯벌은 2020년 8월 현재 세계자연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 중에 있다. 고창갯벌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면 고창군은 유형·무형·자연 등의 모든 세계유산을 가진 한국 유일의 생태·문화·관광 도시가 된다. 또한 고창군은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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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진짜 이야기 들여다 보기. 고창군 무장 지역에서의 농민 봉기는 고을 단위의 농민 봉기였던 고부 봉기가 국지성을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가는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은 현재 고창군에 속하는 무장현에서의 농민 봉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창 지역은 전봉준 생가, 무장기포지, 손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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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객사. 객사는 궐패(闕牌)를 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정청(正廳)으로서, 왕명(王命)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고창 무장객사는 좌·우헌(左·右軒)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창 무장객사의 정문격인 진무루 누각 아래로 진입하면 평지를 두고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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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치소로 사용하던 건물. 고창에서 흥덕으로 11㎞를 더 가면 성내리가 있으며, 이곳에 무장객사, 무장향교와 함께 무장동헌이 있다. 무장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현감이 집무하던 곳이다. 1565년(명종 20)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에서 교실로 사용하는 바람에 변형되었으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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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고 고창군에 있는 주요 도로와 교통수단 및 관련 시설 교통은 사람이나 물건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 모든 활동이나 과정, 절차를 말하며 인류 문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유사 이래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경제 활동이나 사회 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교통이라는 수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교통수단의 발달은 지역의 산업 발전은 물론, 주거 생활의 향상과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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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포구. 구시포(九市浦)는 조선 전기부터 확인되는 옛 포구이며 한자로 구시포(仇時浦)로도 표기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 의하면 구시포의 위치는 “무장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마을 앞 동쪽에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월에 법성포를 출발한 세곡 선단이 첫 번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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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처(處)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일종의 장원(莊園)으로 신라 녹읍제(祿邑制)의 유제(遺制)로 여겨지며, 비슷한 것으로 장(莊)이 있었다. 처는 단순한 면적 단위의 장원이 아니라 단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지역적 행정구역의 하나로서 군현(郡縣)의 하부 단위였다. 그러므로 처는 현으로 승격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군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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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의병. 김축(金軸)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솔과 후학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활약하다 이듬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대를 이를 큰아들만 집에 남기고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진하여 6충, 1효, 4열부를 배출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언(高彦), 호는 남계(南溪). 덕원군의 21세손으로 아버지는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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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남산리는 남산 밑이라서 남산리라 하였다. 임진왜란 전 서당골에 당씨, 변적골에 해주오씨, 지사골에 경주이씨가 살았고, 그 뒤 광주이씨를 비롯하여 진주정씨·상산김씨·창녕조씨 등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는 무장군 탁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산·용장(龍庄)·흥룡(興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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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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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미륵불. 마을에 조성된 미륵불을 마을 미륵이라 부른다. 미륵불은 도솔천 내원궁에 좌정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사바세계로 하생하여 성불한 부처를 말한다. 미륵이 사바세계로 출현하는 곳은 사찰의 가람 배치로 입증되고 있는데, 사찰에서 출현한 미륵불이 중생 구제를 목적으로 마을로 내려온 미륵불을 마을 미륵이라고 한다. 도곡리 미륵암 미륵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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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원촌리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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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심하여 일으킨 봉기. 손화중포(孫化中包)를 중심으로 한 고창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일어난 각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옮아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동학농민혁명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일부분 반영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군들 중 일부는 국권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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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3월 20일을 전후해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는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가 열린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는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를 기념하는 행사로서, 올해[2009년]는 4월 25일에 기념제가 열렸다. 전날까지도 아주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25일 오전부터 날씨가 굉장히 쌀쌀해져서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도착했을 때는 차가운 바람과 검은 구름이 하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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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동학 농민 혁명의 무장기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열고 있는 축제. 고창 지역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난 곳으로 동학 농민 혁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내부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던 전봉준의 태생지이며, 동학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였다.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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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 있는 포구. 동호항은 조선 시대에 동백정포(冬柏亭浦)와 영신당이 있었던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장군읍지(茂長郡邑誌)』 등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동백정포는 “무장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했으며, 그 지형은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삼면이 바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동호마을 일대와 일치 한다. 동백정포는 동호마을의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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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무령군조에 "본디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장현조에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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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을 시조로 하고 김자진을 입향시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의 세거 성씨. 무장김씨(茂長金氏) 시조인 김선(金璇)[1343~1414]은 김해김씨의 시조인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의 56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고, 1375년 공민왕이 서거한 뒤 벼슬을 버리고 장사현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김해김씨에서 분관하여 김선을 장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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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속하는 법정리. 무장리는 무장현의 소재지였으므로 무장(茂長)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무장군 이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중거(中巨)·정거(井巨)·하거(下巨)·사죽(射竹)·덕림·고라·이동·상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장리라 하고 무장면에 편입하였다. 무장리는 무장면의 중심부에 있다. 2010년 3월 기준 면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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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행정구역. 1417년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병할 때 두개의 현의 중간 지점에 해당된 곳에 무장현이 자리를 잡으면서 생긴 지명이다. 백제 시대에 송미지현과 상노현에 속하였고, 757년(경덕왕 16) 송미지현을 무송현으로, 상노현을 장사현으로 각각 개칭하였으며, 1417년(태종 17)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무장군 이동면(二東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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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면 관할 행정 기관. 무장면사무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과 관련된 지방 행정의 기초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무장면은 백제 시대에 지금의 성송면, 대산면, 무장면의 일부였던 송미지현(松彌知縣)에 속해 있었으며 신라 시대에 무송현(茂松縣)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인 1417년(태종 17)에 이웃 장사현(長沙縣)과 합하여 무장현(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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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군.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 1991년 2월 21일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가 옛 정취를 자아내고, 성내에는 객사, 동헌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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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고창 지역의 군사 조직. 조선의 군사제도는 고려의 유제를 답습하였다. 각 도마다 전담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있어군사 행정과 전투 수행을 책임졌다. 1397년(태조 6) 태조는 군사 단위로서의 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진(鎭)을 설치하여 도절제사 대신 첨절제사를 두고 부근 군현의 병마를 통괄하는 동시에 도관찰사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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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지역에 설치된 조선 전기의 행정구역. 조선 시대에 현(縣)은 지방 행정구역인 주부군현(州府郡縣) 가운데 가장 낮은 단위의 행정구역이다. 현은 지방 행정구역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군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군현제도가 그것이다. 군과 현은 군이 현을 거느리는 행정적 상급 단위라기보다는 병렬적 관계였다. 군현제도는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체계이고, 이는 중앙 집권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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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있는 국가 및 지방 지정 문화유산. 문화재는 유형에 따라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 등으로, 지정 여부에 따라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 2010년 현재 고창군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23점[보물 5점, 사적 5점, 천연기념물 7점, 중요민속문화재 2점, 국가무형문화재 1점, 등록문화재 2점, 명승 1점], 도 지정 문화재 54점[유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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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 봉기가 발발한다. 1890년대 호남 지방에서 사회 혼란을 틈타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의 배꼽에 장식되어 있고, 그 ‘배꼽’과 ‘미륵비결’ 설화가 관련되어 있다. 선운사 「석불비결 설화」의 주체는 무장에 도소를 둔 동학 접주 손화중(孫化中)이 주체이지만, 동학도라기보다는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이었다.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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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의 신앙 중 이상적인 미래 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불과 미륵보살을 믿는 불교 신앙. 미륵 신앙은 상생 신앙과 하생 신앙의 구도를 갖추고 있다. 미륵 상생 신앙은 사후에 극락왕생하여 도솔천 내원궁에서 천중들에게 교화하는 미륵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도솔천으로 왕생을 서원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며, 미륵하생신앙은 석가모니 입멸 후에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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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모든 봉수에는 봉수대가 5개 있었는데 이는 거수를 5구분하였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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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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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사찰은 절, 사원(寺院), 정사(精舍), 가람(伽藍)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우기를 피해 한 곳에 모여 생활을 하는 공동 주거지의 성격을 띠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종교 의례를 행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변모하였다. 전라북도 고창군의 주요 사찰과 사찰 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선운사(禪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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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합성어이다. 누정은 정자의 고유 명사인 정호에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건축물로, 주로 마루로 되어 있다. 참고로, 정호에 당(堂)이나 각(閣), 태(台) 등의 문자가 붙은 건축물이라 해도 마루가 주가 되어 사방으로 트인 건축물이라면 누정으로 본다. 한편, 누(樓)와 정(亭) 자가 붙은 정호라도 건축물의 구조가 방과 부엌 중심이라면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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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시인. 서정주(徐廷柱)는 탁월한 언어 감각과 누구도 밟아 보지 못한 토속어로 일군 빼어난 시의 미학을 보여 준 언어의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문학을, 이승만과 전두환의 독재 시절에는 독재를 미화하는 글을 써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당의 아버지 서광한은 무장에서 향시를 보아 장원을 하였고, 1909년 일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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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서부 해안에 있는 바다. 대한민국에서는 서해(西海), 중국에서는 황해(黃海)가 국제 표준으로 쓰인다. 서해는 우리나라의 서쪽에 위치한 바다이고, 황해는 중국 황하의 토사가 유입되어 바다 색깔이 대체로 황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는 서해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고창군의 북부 지역인 부안면은 북서쪽과 동북쪽이 서해의 해안선에 접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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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성보박물관 앞에 있는 조선 후기 미륵 석상. 선운사 미륵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과 관련 있는 자그마한 석불상으로, 미륵불라고 부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양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 마애불의 배꼽에서 조선 후기 무장현의 손화중 동학 접주가 비기을 꺼냈다는 석불 비결 설화가 전해 온다. 선운사 미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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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 시설. 성곽이란 성(城)과 곽(郭)의 합성어이다. 성은 내성을 말하고 곽은 성의 주위를 에워싼 나성의 형태로 우리나라는 내성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성곽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전적 의미로 성곽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이 공동 목적을 갖고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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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같은 성과 같은 본관을 가지고 살아 온 성씨.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은 한국 성씨의 보급 시기를 고려 전기로 잡고 있다. 후삼국이 쇠퇴하면서 일찍부터 지방에 내려가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 귀족의 후예와 재래의 토착 촌주층(村主層)이 중심이 된 호족(豪族)들은 실질적으로 군현(郡縣)을 장악하고 스스로 관반(官班)을 형성하여 지역을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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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사용되는 삶의 지혜를 드러내는 짧은 문장의 격언. 속담은 대체로 교훈이나 풍자, 비판 등을 하기 위하여 어떤 사실을 비유적인 방법으로 서술한 짧은 구절이다. 대개 고정적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시적 의미보다는 표현이 담고 있는 비유적 의미에 의해 본뜻이 전달된다. 속담은 역사적 변천에 따라 함께 변화하면서 전해 내려온 지식적·정신적 유산 중의 하나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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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대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또는 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이다. 1861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烈)과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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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행정 구역. 산의 지형이 ‘마음 심(心)’자, ‘으뜸 원(元)’자와 비슷하여 심원이라 하였다. ‘심’자의 첫 번째 점은 양산골에서 맥(脈)을 이루어 내려오다가 고인돌군이 형성된 비석바위등에 해당하고, 가운데 점은 여양진씨(驪陽陳氏) 선산인 큰똥뫼에 해당하며, 오른쪽 점은 밀양손씨(密陽孫氏) 효열각이 있는 작은똥뫼, 구부러진 획은 월산(月山) 뒷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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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도 무장현 고적조에 "약수향은 염정(鹽井)을 약수라고 일컫는다[藥水鄕鹽井稱藥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대동지지(大東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고창현읍지(高敞縣邑誌)』 등에 관련 기록이 있다. 약수향은 무장현에 소속되어 있던 향으로 지금의 심원면 월산리 일대이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현의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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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군의 역사. 고창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6, 잡지 제5 무량군편에서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신라 경덕왕 때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고창군은 신라 때에 고창현으로 무령군이 관할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창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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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무장(靈茂長) 농악의 ‘영무장’은 영광과 무장을 통칭하여 두 지역이 동일 문화권임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영무장으로 통합되는 권역은 좁은 의미에서의 영광과 무장이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두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장성, 함평 등지를 포괄하는 광역적인 명칭이다. 세습 무계 집단의 이념적 지향과 관련하여 동학 농민 혁명과 세습 무계 예인들이 구체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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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만화리·신촌리와 공음면 신대리에 걸쳐 있는 산. 왕제산(王帝山) 정상은 선인봉과 옥녀봉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주민들은 선인과 옥녀 형상의 산이라고 하여 왕제산(王帝山), 왕재산 또는 왕산이라 부르며 신령스럽게 여겼다. 또한 풍수지리상 여우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서 ‘여시뫼봉’이라고도 부른다. 왕제산은 선운지맥과 전라남도 영광군의 산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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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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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고창군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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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젓대·양금(洋琴) 연주자. 유봉은 1887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났다. 맹인으로 젓대와 양금의 명인이었다. 그의 제자로 역시 맹인 연주자로 유명한 편재준(片在俊)이 있다. 고창 지역에서는 유봉을 포함하여 은성익(殷成益), 마금선(馬金宣), 김남수(金南洙), 진수정(陳洙頂), 김홍진(金洪鎭) 등이 풍류[정악(正樂) 가운데 악기의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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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상경(商卿), 호는 삼소당(三笑堂). 관란(觀瀾) 유춘발(柳春發)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유동현(柳東賢)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유철견(柳鐵堅)이다. 친아버지는 유교령(柳喬齡)이고, 양아버지는 생원 유만령(柳萬齡)이며, 양어머니는 해미곽씨(海美郭氏)로 곽성구(郭聖龜)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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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유학(儒學)의 성립과 발전에 힘쓴 사람들. 우리나라에 유학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 시대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경전은 1992년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발견된 죽간에 기록된 『논어(論語)』이다. 이것은 B.C. 4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학이 고창 지역에 언제부터 들어와서 퍼지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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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무장현감을 지낸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증조할아버지는 조선개국공신인 유창(劉敞)이며, 아버지는 강릉 유씨 좌랑공파 파조인 유계주(劉繼周)이다. 아들은 진원현령(珍原縣令)을 역임한 유세분(劉世扮)이다. 유한량(劉漢良)은 효행과 덕행으로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제수하여 1570년(선조 3) 11월부터 1571년 11월까지 무장현에서 근무하였다.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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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이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의병 항쟁.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의 대북 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과 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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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대성(大成)이다. 1858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영당리 소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윤록이다. 이문교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무장현 청해면 안산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로 이사했다가 다시 왕거마을로 옮겨 살았다. 이후 이문교는 외가 사람들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入敎)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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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의 인구, 산업, 교통 등의 인문지리 요소. 고창 지역 사람들이 고창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고창 지역만의 독특한 인문지리적 결과다. 고창 지역에서는 중기 구석기인 5만 2000년부터 고수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심원면의 대죽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편이 출토되었고,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고인돌은 전 세계 최고의 밀집도와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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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때에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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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무령군조에 "본시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으로, 경덕왕이 장사(長沙)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다[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현 건치 연역조에는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가 장사라고 고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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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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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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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개항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현재의 고창은 고창현과 무장현(茂長縣), 흥덕현(興德縣)이 통합되어 성립되었다. 고창현은 고려 시대에 상질감무가 겸무하였다.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비로소 고창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455년(세조 1)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속읍이 되면서 현감을 파견했고, 속오군(束伍軍)은 입암산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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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고룡동을 연결하던 조선 시대 나루의 터. 좌치나루터는 옛 무장현[현 무장면]과 흥덕현[현 흥덕면]의 해안을 연결하는 나루로, 외부 소금장수들이 질마재를 넘어 무장현의 해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사러 다니거나 심원면 사람들이 부안면 난산장[알뫼장]을 오가는 데 이용되었다. 풍수로 꿩이 앉은 형국이어서 좌치나루터라고 한다. 나루 양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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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있는 진주정씨 가문의 정문. 진주정씨(晉州鄭氏) 가문의 충신, 효자, 열녀들이 누대에 걸쳐 정려를 하사받았다. 진주정씨 삼강각에는 하나의 비석과 열세 개의 현판이 있어 이들의 활동 사항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정흘(鄭屹)은 정유재란 때 창의하여 의진에 임했으나, 전라감사가 무장현[현 무장면]에 현감 자리가 공석이자 현감 직책을 맡아 성을 지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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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촌락. 집성촌은 성(姓)과 본(本)이 같은 부계의 혈족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을 의미한다. 마을을 주도하는 성씨가 상대적으로 결속하면서 토성과 세거성씨가 중심이 된 동족 마을이 발달하게 되었다. 1.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수록된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고창 지역의 세거성씨를 보면 고창현의 토성은 오(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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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원촌리에 있는 각석. 첨금정(添襟亭)은 원촌리의 논 가운데에 있는 각석으로 고인돌로 축조된 커다란 덮개돌에 조선시대 각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는 길 옆에 자리하였으나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논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무장읍지(茂長邑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따르면 무장현 동쪽 5리에 첨금처(添襟處) 혹은 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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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무송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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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역(驛)은 교통 통신 기관으로 우역(郵驛)·역관(驛館)·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으며, 군사·외교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 집권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이라 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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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에 있는 배을서(裵乙瑞), 배세조(裵世祚)를 배향한 일제 강점기 사우. 청정공(淸靖公) 배을서(裵乙瑞)를 주벽으로, 송간(松澗) 배세조(裵世祚)를 배향했다. 배을서는 총명하고 재기가 비범하여 길재(吉再)에게서 수학하였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정몽주와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여 척불흥학(斥佛興學)을 사명으로 삼았고, 부모 장례를 마치고는 3년여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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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에 있는 배을서(裵乙瑞), 배세조(裵世祚)를 배향한 일제 강점기 사우. 청정공(淸靖公) 배을서(裵乙瑞)를 주벽으로, 송간(松澗) 배세조(裵世祚)를 배향했다. 배을서는 총명하고 재기가 비범하여 길재(吉再)에게서 수학하였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정몽주와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여 척불흥학(斥佛興學)을 사명으로 삼았고, 부모 장례를 마치고는 3년여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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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개최되는 각종 의례와 행사. 축제는 모든 예술이 미분화 상태로 엮어 있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띤다. 더불어 축제의 원래 의미 속에는 종교성이 포함되므로, 축제는 예술적 요소가 포함된 제의를 일컫는다. 축제는 애초 성스러운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했으나 유희성이 강화되며 오늘날에는 종교적 신성성이 거의 퇴색되었다. 하지만 축제라는 말 자체가 곧 제의와 놀이를 포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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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고창 지역의 배가 드나드는 개의 어귀. 포구(浦口)는 바닷물이나 강물이 드나드는 ‘개[浦]’ 중에서 배가 입·출항하는 곳을 말한다. 위치에 따라 바닷가에 있는 해상 포구와 강가에 있는 강상 포구로 나눌 수 있고, 기능에 따라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건너는 나루와 배가 입·출항하는 포구로 나누어진다. 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는 서쪽 해안의 무장현과 흥덕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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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기포는 1894년 3월 15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당시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는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이 모였는데, 이들은 죽창을 만들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뒤 대오를 정비하였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마침내 3월 20일 이곳에서 창의문을 낭독하고 기포하였다. 무장기포 직전 무장현 일대는 동학의 교세가 대단히 컸다. 동학의 교세는 전라도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