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6월 최재화가 주동이 되어 경상북도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보낸 사건.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은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해평 산양리의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1919년 4월 2일 밤 동민들을 이끌고 고향인 해평경찰서(海平警察署)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또한 대구로 나가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김수길(金...
-
1950년 8월 6·25전쟁 시 국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渡河)를 저지하기 위해 비산진에서 벌인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6월 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 대전(大田)을 장악한 뒤, 8월 15일까지는 낙동강 선을 넘으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7월 말 북한군 제15사단(총병력 약 5,000명)은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주(尙州) 정면에서 공...
-
조선 후기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에서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농민항쟁. 구미시 선산은 18세기 이래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유통경제가 발달하는 추세 속에서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선산에서는 쌀과 면화 및 면포가 상품화되어 경상도는 물론, 물길로 서울·강원도·충청도·함경도까지 판매되었다. 쌀과 면포 외에 마포·콩·보리 등도 상품화되어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이 같은 상업적 농업의 발...
-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구미 선산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선산에서는 선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3일 만세 계획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4월 12일 권오환(權五煥)을 중심으로 선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거...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의 군위현조에 이보의 약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인동현감으로 재임하면서 당시 인동은 왜구의 중요 통로가 되어 왜구의 피해가 특별히 심하여 전야(田野)가 비었고 사는 사람이 없는지라 관찰사가 논계하여 읍을 혁신하고 공으로써 임시 현감을 차임하고 또 과곡관을 겸임하니 추절을 당하여 득곡함이...
-
936년 고려와 후백제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싸운 전투.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골품제가 붕괴되고 중앙귀족이 왕위쟁탈전을 벌이자 주군현이 공부(貢賦)를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되었다. 나라 창고는 고갈되고 왕은 조세의 납부를 독촉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도적이 상주의 원종·애노, 북원의 양길·궁예,...
-
1919년 4월 8일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한말 의병장 허위(許蔿)의 출신지인 구미시 임은동은 항일의 기풍이 강한 곳으로, 1919년 4월 8일 강용준(姜龍俊)·유시동(劉時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
-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배달시켜 폭발토록 만든 사건. 3·1운동에 나타난 만세시위 위주의 평화적·수세적 방식으로는 독립이 요원해지자,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이 행동적·공세적인 방식으로 변해갔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많은 비밀결사체가 조직되고, 독립운동의 전선도 사상이나 이념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은...
-
1919년 3월 12일과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진평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인동 진평동에서는 3월 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학생과 지역 유지들이 결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거를 시발로 비안·김천·포항을 거쳐 안동·경...
-
조선 말기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허위의 구국 의병투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선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두발과 복장의 형태마저 강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다. 일찍부터 일본과 서양을 금수(禽獸)로 여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