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66
한자 閔以升
영어음역 Min Iseung
이칭/별칭 성재(誠齋),언휘(彦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상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자
출신지 경기도 부천시
성별
생년 1649년연표보기
몰년 1698년연표보기
본관 여주(驪州)
대표관직 영릉참봉

[정의]

조선 후기 부평도호부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 아버지는 민만(閔晩)이고, 어머니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부인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민윤창(閔允昌)·민경창(閔景昌)·민회창(閔會昌) 등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민이승(閔以升)은 부평[현 서울특별시 구로구를 포함한 인천광역시 북부 및 북동부, 경기도 부천 일대]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통독하면서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이후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았고, 당대 석학이던 김창협(金昌協)과 교류하면서 그 명성을 떨쳤다.

1682년(숙종 8) 대신들의 천거로 창릉(昌陵)과 영릉(英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으며, 후에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다. 그 후 좌랑(佐郞)과 위수(衛率)를 거쳐,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집·기록하고, 종실의 잘못을 조사하고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 보던 관청인 종부시의 주부로 제수되자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명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학문과 사상]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숙종24년 11월 5일자에 민이승의 졸기(卒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이승의 자는 언휘로서,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력으로 학문에 자신을 맡겨 윤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실로 모든 책을 다 읽었으며 육경(六經)을 자기의 말처럼 암송하였다. 부서진 집의 떨어진 자리 위에 종일토록 위좌(危坐)하여, 나물에 현미밥조차 잇지 못했어도 또한 태연하였다. 비록 자질을 반드시 크게 받지 못하여 견식(見識)에 혹 치우침이 있는 듯하였으나, 말과 의논이 명백하고 절실하며 공부하는 데 각고(刻苦)함은 일시의 모든 선비들에게 크게 복종 받았다.

천거를 받아 조정에 올라 조그마한 읍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다가 곧 돌아왔는데, 청렴하고 엄격함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렸으며, 또 그곳 백성들이 떠난 뒤에도 사모하였다. 북방(北方)에 조회를 갔다 왔으며, 또한 대직(臺職)과 경연(經筵)에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류(士流)들이 애석해 하였다. 호는 성재이다.”

이와 같이 민이승은 관직보다는 제자백가 연구에 몰두하였다. 윤명좌(尹明左)·심연희(沈延熙) 등과 함께 윤증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윤증민이승을 칭하여 말하기를, “성재는 마음과 노력을 다하여 모든 일에 힘쓰니 다른 사람이 민이승과 같다면 이루지 못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이승은 당대 석학이던 김창협과도 학문을 논하였다. 또한 매우 뛰어난 재질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경전에 주를 달고 해석을 붙였다. 또한 유가와 도가 등 제가(諸家)와 역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어 모든 경서에 붙여진 주석의 내용을 살펴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고 바로잡는 일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10여 편의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재집(誠齋集)』 7권만 전한다.

[묘소]

묘소는 원래 경기도 의왕시 미륵당 부근에 있었으나 김포로 이장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